그룹명/문화유적유물산책

범어사(梵魚寺)Ⅰ

도랑도랑 2020. 3. 23. 23:04

 

 

범어사 내 여러 건물 가운데 가장 유명한 건물이란다. 여느 일주문과는 달리 생김새 부터가 독특하다.
어른 둘이 팔을 벌려 마주잡아야 할 만큼 굵은 돌기둥 넷이 일직선상에 나란히 서고 그 위에 다시 짧은 나무기둥을 얹었다.
그 위에 창방과 평방 그리고 공포를 짜올린 뒤 맞배지붕을 덮은 간략한 모습이다.

전통 건물에서는 흔히 주춧돌이 낮고 그 위에 놓이는 나무기둥이 길었던 것에 비해 주춧돌이 길어지고 나무기둥이 짧아진 것이라 하면
그 기이한 형태의 발상을 이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범어사 일주문의 기둥은 매우 독창적이다.

또한 길어진 주춧돌 위에 짧은 나무기둥을 그저 얹었을 뿐 둘을 연결하기 위한 별다른 장치를 한 것도 아닌데, 그러고도 무너지지 않은 채
오랜 세월 의젓함을 잃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여간 대견한 건축술이 아닐 수 없다는 평을 받고있다.

 

 

일주문이 처음 건립된 것은 광해군 6년(1614)이며, 숙종 44년(1718)에 돌기둥으로 개조한 뒤 정조 5년(1781)에 다시 세웠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재 일주문의 돌기둥은 1718년에 세워진 그대로인 셈이다. 어칸에 ‘曺溪門’(조계문)이란 편액이, 그리고 좌우에

‘金井山梵魚寺’(금정산범어사)와 ‘禪刹大本山’(선찰대본산)이란 편액을 두어서 일주문의 이름과 사찰의 이름 및 성격을 밝히고 있다.
의상대사가 창건할 당시에는 화엄사찰로 출발했지만, 지금은 선종사찰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曺溪門 (조계문) 편액

 

조계문 (보물 제1461호)

1614년 묘전화상이 창건한 이 문은 가람진입로에 순차적으로 세운 산문 중에 첫 번째문으로 산문이라고도 하며
기둥이 일렬로 나란히 서서 지붕을 받치므로 일주문이라고도 한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주문으로 알려져 있다.

 

 

金井山梵魚寺 (금정산범어사) 편액

 

 

禪刹大本山 (선찰대본산) 편액

 

 

曺溪門 (조계문)의 背面 (배면)

 

 

 

성보박물관(聖宝博物館) 앞 마당의 목련나무

 

 

범어사(梵魚寺) 천왕문(天王門)

 

천왕문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동산 스님의 친필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帝釋天王慧鑑明(제석천왕혜감명) / 제석천왕의 지혜는 밝게 빛나니
四洲人事一念知(사주인사일념지) / 세상사를 한 생각에 알도다.
哀愍衆生如赤子(애민중생여적자) / 중생을 갓난아기처럼 가엾게 여기니
是故我今恭敬禮(시고아금공경례) / 나 이제 공손히 예를 올리노라.

 

 

천왕문은 삼문 가운데 두 번째 문으로서 13단의 높은 석계를 오르는 축대상에 4구의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모신 건물이다.
본래 사천왕은 지상의 가장 가까운 하늘에 있으면서 동서남북 사방을 담당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선을 장려하고 악을 막는 기능을 가진 불법(佛法)

수호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점에서 천왕문은 범어사 성역에 이르기 위해서 속진(俗塵)을 걸러 내는 중요한 통과 의례 체가름 장치에 해당된다.

 

 

숙종 25년(1699)에 자수 스님이 처음 건립했다고 하는데 그 뒤로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겠지만 확인되지 않는다.
최근에 새로이 단장하였는데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평면에 풍판을 단 겹처마의 맞배지붕을 얹었으며 좌우 협칸에는 사천왕상 4구를 모시고

어칸은 통로가 되게 하였다. 큰 막돌 덤벙 초석 위에 두리기둥을 세우고 창방 뺄목을 초익공으로 만들어 이익공과 1출목의 행공을 걸어서

장혀와 보뺄목을 결구하여 외목도리를 받게 하였다.

 

내진 기둥으로 대들보의 중앙을 받치고 동자기둥을 세워서 종보를 걸고 다시 화반대공(花盤臺工)을 세워서 종보를 걸고 다시 화반 대공을 세워서

종도리를 받게 한 5량가(梁架)이며 연등 천장을 꾸몄다. 전형적인 조선 후기의 익공식 가구의 특성을 갖고 있어서 지금의 건물은 초창기로부터

뒤에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고 한다.

 

 

가람(伽藍) 진입로에 순차적으로 세운 삼문(三門) 중 셋째 문으로 다른 사찰에서는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불이(不二)란 있음과 없음, 삶과 죽음, 선과 악 등 양 극단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적 관점을 뜻한다.
숙종 20년(1694)에 자수(自修) 장로가 창건했으며, 가운데 어칸 좌우 기둥에는 동산(東山)대종사가 쓴 '신광불매만고휘유(神光不昧 萬古徽猷)' 와
'입차문래막존지해(入此門內 莫存知解)'라는 주련(柱聯)이 걸려 있다. 신광의 오묘한 뜻을 알기 위해서 이 문을 들어서면서부터 분별심을 내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산사(山寺)에 들어서는 마음 자세를 지적한 것이다. 2012년 보재루(普濟樓)를 대대적으로 중창할 때 철거한 후 다시 지었다.

 

 

 

범어사 불이문(不二門) 편액

 

 

보제루 (普濟樓)

보제(普濟)란 널리 중생을 제도한다는 뜻으로 보제루는 많은 대중을 위한 법회용 건물로 사용된다.
흔히 이러한 중정(中庭) 누각(樓閣)은 대웅전(大雄殿) 앞마당 입구의 축대에 걸쳐서 벽체가 없는

2층 별서식(別墅式)으로 짓지만 이후로는 법회를 여는 강당으로 사용하면서 벽체를 친 경우가 많다.

이 건물도 숙종 26년(1700)자수(自修) 장로가 별서식 누각으로 창건했으나 순조 12년(1812) 중건 때 단층으로 바뀌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벽체가 쳐지고 일본식으로 일부 변경되었다.
2012년에 전통 법식으로 복구하기 위해서 대대적인 중창공사로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범어사 보제루 (梵魚寺普濟樓) 편액

 

 

 동백꽃 떨어진 꽃 잎도 봄날의 햇볕에 눈이부시다.

 

 

 

범어사(梵魚寺)
화엄종(華嚴宗) 10찰(刹)의 하나이며, 일제강점기에는 31교구 본산의 하나였다.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 《삼국유사》의 678년(문무왕 18)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신승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금빛나는 물고기가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에서 놀았다고 하여 금정산(金井山)으로 이름짓고
그곳에 사찰을 지어 범어사(梵魚寺)를 건립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범어사(梵魚寺) 대웅전 편액

 


 

범어사창건사적(創建事蹟)에서는 당시 범어사의 가람(伽藍) 배치는 미륵전 ·대장전(大藏殿) ·비로전(毘盧殿) ·천주신전(天主神殿) ·유성전(流星殿)
종루(鍾樓) ·강전(講殿) ·식당 ·목욕원 ·철당(鐵幢) 등이 별처럼 늘어서고 360 요사(寮舍)가 양쪽 계곡에 꽉 찼으며, 사원에 딸린 토지가 360결(結)이고
소속된 노비(奴婢)가 100여 호에 이르는 대명찰(大名刹)이라 하였는데, 이 많은 것이 창건 당시 한꺼번에 갖추어졌다고 믿기는 어려우며 상당 기간에

이루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버려 10여 년을 폐허로 있다가 1602년(선조 35) 중건하였으나 또다시 화재를 당하였고, 1613년

(광해군 5) 여러 고승들의 협력으로 중창하여 법당 ·요전(寮殿), 불상과 시왕상(十王像), 그리고 필요한 모든 집기(什器)를 갖추었다.

 

 

 

현재 보물 제434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3층석탑(보물 250호), 당간지주(幢竿支柱), 일주문(一柱門), 석등(石燈), 동 ·서 3층석탑 등의

지방문화재가 있으며, 이 밖에 많은 전각(殿閣) ·요사 ·암자(庵子) ·누(樓) ·문 등이 있다. 옛날부터 많은 고승들이 이 곳을 거쳤으며, 중요한 인물만도

의상을 비롯하여 그의 고제(高弟) 표훈(表訓) ·낙안(樂安) ·영원(靈源) 등이 있다. 《선찰대본산 범어사안내(禪刹大本山梵魚寺案內)》에는 역대

주지(住持) ·승통(僧統) ·총섭(摠攝) ·섭리(攝理) 등으로 구분하여 수백 명이 기록되어 있다. 부산 금정구 청룡동(靑龍洞) 금정산(金井山)에 있다.

 

 

 

1862년에 만들어진 대웅전 앞 금고 이것은 바깥 지름이 90㎝에 달하는 대형 금고이다.

 

 

 

 

 

 

                                                                                                                                                                           촬영일 : 2020년 03월 23일 (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