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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남서원(廣南書院)

도랑도랑 2019. 12. 24. 23:45

 

 

광남서원(廣南書院)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성동리에 있는 서원.
조선 초의 문신 황보인(皇甫仁, 1387~1453)과 그의 아들 황보석(皇甫錫), 황보흠을 배향하고 있다.

 

1791년(정조 15) 지방 유림들과 후손들이 세덕사(世德祠)로 창건하였으며, 1831년(순조 31)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하였다.
그후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철폐되었다가, 1900년에 다시 복원하였다.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로는 사우·강당·동재·서재·내삼문·외삼문·주소 등이 있으며 서원 뒤쪽에 유허비(遺墟碑)가 있다.
영천 황보씨(永川皇甫氏) 문중에서 운영과 관리를 맡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지낸다.

 

유물로는 황보인의 책판과 문집 외에 서적 30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향사인물 중 황보인은 사간원 정언, 집현전 학사, 형조참의, 강원도관찰사,

병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을 지냈다. 이후 단종을 보좌하다 1453년 계유정란 때 역모죄로 몰려 살해되었으며, 단종 복위와 함께 신원이 회복되어

충정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돌담 사이의 정면으로 복양문이라는 현판과 태극문양이 눈에들어 오면서 골목을 들어서면 좌측에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그 뒤로 영의정충정공지봉황보선생신도비(領議政忠定公芝峯皇甫先生神道碑)와 비각(碑閣)이 있고 복양문(復陽門) 좌, 우측으로 들어서면 서원의 마당으로 들어갈수가있다.

 

 

복양문(復陽門)의 현판

 

 

 

 

 

광남서원(廣南書院)은 숭의당 뒤쪽으로 자연석 축대를 2단으로 쌓아 사당 영역을 형성했다.
사당 영역 우측에 숭의당 옆쪽으로 계단을 통해 진입이 가능한 곳에 충비단량지비각(忠婢丹良之碑閣)과 추원단(追遠壇)을 뒀다.
복양문의 좌측에 비각이 있으며 복양문의 외부로 담을 둘러싼 것은 특이한 점이다.

 

 

 


영의정충정공지봉황보선생신도비(領議政忠定公芝峯皇甫先生神道碑)

 

신도비(神道碑)는 왕 또는 고관의 무덤 앞이나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 세워 죽은 이의 사적을 기리는 비석을 말한다.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神靈)의 길을 의미한다.

 

 

 

 

광남서원(廣南書院)은 복양문(復陽門), 강당, 내삼문, 사당까지 한 축선에 놓인 전학후묘(前學後廟)형태로 강당앞에 동재와 서재를 배치해 조선시대

서원양식을 보여주는 옛 건축물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 훼철되었다가 그뒤 복원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충정묘(忠定廟), 8칸의 숭의당(崇義堂), 3칸의 동재(東齋)·서재(西齋), 신문(神門) 및 6칸의 주소(廚所) 등이 있다.

 

숭의당은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되고, 협실 왼쪽 방은 헌관실,

오른쪽 방은 재석(齋席) 및 별유사의 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숭의당(崇義堂)에서 바라다본 복양문(復陽門)

 

 

충정묘(忠定廟)

 

광남서원 강당의 뒤쪽에는 충정묘(忠定廟)라고 현판이 걸려있는 사당이 있다.

사당은 성현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공 교육기관인 향교와 사교육기관인 서원은 사당의 영역도 다르다.


향교에서 사당은 대성전이라고 하는데, 이는 유교에서 대성, 즉 공자를 모셨기 때문이다. 대성전은 중국의 여러 성현과 한국의 열 여덟 분의 성현을

동시에 모시기도 한다. 그러나 서원은 그 지역과 연고가 있는 한국의 성현만 모시는곳이다. 이름도 향교는 대성전이지만 서원은 모신 분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 사당의 이름으로 쓰기도 한다.

 

사당인 충정묘(忠定廟)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맞배지붕집으로 공포는 이익공 구조이다.
방형으로 다듬은 자연석 기단위에 콘크리트 마감을 하고 원형 초석과 원기둥을 얹었다.

사당의 주위는 기와를 얹은 돌 담으로 둘렀으며 평삼문을 두어 신문(神門)으로 사용하였다.

 

 

 

 

 

 

 

충비단량지비각(忠婢丹良之碑閣)과 추원단(追遠壇)

사당 영역의 우측에 숭의당 옆쪽으로 계단을 통해 진입이 가능한 곳에 충비단량지비각(忠婢丹良之碑閣)과 추원단(追遠壇)을 볼 수 있다.

추원단(追遠壇)은 입구를 낮게 만든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추원단(追遠壇)현판

 

 

 

 

포항에는 충절을 지킨 ‘충비(忠婢)’ 단량, 순량, 갑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조선시대의 엄격한 신분제 하에서 노비로 살아야 했지만,

이들이 지킨 충절과 의리는 신분제의 한계를 뛰어넘어 많은 이들의 존경심을 사기에 충분했다.구룡포의 단량은 역적으로 몰린 가문의 자손을 돌보아

주었고, 곡강천의 순량은 모시던 주인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따라 죽었다. 연일읍의 갑연 또한 주인을 구하려 자신의 목숨을 버린 충절의 상징이다.

 

 

 

 

 

 

충비 단양은 조선조 세종과 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보 인의 여종이었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켰던 1453년(단종 1)에 황보 인이 수양대군에 의해

살해되었고,이에 화가 전 가문에 미칠 것을 예견한 단량은 황보 인의 손자인 황보 단을 물동이에 숨겨 이고, 몰래 집을 빠져 나와 800여리를 걸어 황보 인의

사위가 살고 있던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닥실리(닭실마을) 까지 죽을 듯이 달려왔다.

 

그러나 그곳도 안전하진 못했고 화가 곧 그곳에도 미칠 것을 우려한 단량은 노자를 얻어 무작정 남쪽(평해, 임곡의 바닷가 길)으로 도망치다가 장기현 관할인

오늘날 포항시 남구 대보면 구만리에 다달아 그곳 주막 여인의 도움으로 짚신골이란 곳에 머물게 되었다. 그곳에서 단을 친자식처럼 키워 성인이 된 뒤에야

그에게 집안 내력을 일러 주게 되었다고 한다.

 

단의 증손 황보 억은 현 성동리 뇌성산(뇌록) 자락으로 이거하여 세거지를 이루었다. 이처럼 황보 가문은 충비 단량의 도움으로 가문의 멸문지화를 막고

4대가 숨어 살다가 290년만인 숙종 때에 와서야 누명이 풀려 황보 인과 그의 두 아들이(황보 석, 황보 흠)이 관적을 회복했다. 보 인은 영조로부터 충정공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고, 단양의 뜻을 기리기 위해 황보 가문의 후손들이 서원 뒤뜰에 비를 세웠다고 한다.

 

 

 

 

 

 

 

 

 

블루밸리산업단지 하면 우선 먼저 떠오르는 생각들은 웰빙식품으로 널리 알려진 블루베리라는 과일 열매를 생각할것이다.

정확한 이름은 '포항블루밸리국가산업단지'이다. 2014년 10월 1단계 공사에 착공한 블루밸리국가산업단지는 2019년까지 총사업비 7천360억원을 투입해

포항시 남구 동해면 · 장기면 · 구룡포읍 일대 611만9천㎡ 규모의 산업단지를 조성하게 되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확트인 도로가 시원스럽게 펼쳐져 있다.

이 도로가 개설되기 전 산길을 따라 한 두차레 다녀본 적은 있었지만 요즘은 낚시를 갈 때 이길을 따라 동해안 925번 지방도로를 즐겨이용하기도 하는데

미개통 구간 끝 부분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오르면 길 옆에 남광서원이 있다.

 

 

 

블루밸리(blueberry)국가산업단지, 또 다른 지역에서의 최첨단산업단지로는 하이테크밸리 (hightech valley), 테크노밸리(Technovalley) 등의 용어들이

낯설게 들리기도 하지만 이러한 산업단지의 명칭들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남동부 지역의 계곡 지대를 이르는 실리콘 밸리 (Silicon Valley)에서

비롯된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밸리(valley)는 1.계곡, 2.골짜기, 3.유역을 뜻하고 블루(blue)는 파란색. 청색. 우리나라에서는 예부터 초록·남·곤 등의

총칭으로서 청(靑:파랑)으로 썼다.

 

 

 

몇 해전 당시만 해도 구만리(九萬里)에는 보리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그 보리밭 가운데 소나무 다섯그루가 유명하기로도 소문이나 있었다.
그때 구만리(九萬里) 마을 이름의 유래에서 구만리(九萬里)라는 지명은 1453년 계유정난 때 역적으로 몰려 수양대군에게 살해당한 영의정 황보인의

노비가 황보인의 어린 손자를 물동이에 숨겨 한양에서 구만리나 떨어진 호미곶으로 피신한 데서 유래했다. 후손들은 가문을 잇게 해준 노비 단량을 기리는 비석을 구룡포 광남서원에 세웠다. 라는 내용을 읽어보고 그 광남서원을 한번 구경해 봐야겠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늘 그 앞을 지나쳐 다니기만 했었다.

 

서울 - 포항간 거리를 검색해 보면 약 367km, 우리가 전통적으로 알고 있는 “10 리 = 4 킬로미터”라는 공식으로 생각을 해 보면 한양을 떠나 호미곶까지

800리 길이라는 내용이 신빙성은 있어보이나 교통이 발달한 오늘날의 단순한 계산법일테고 숨죽여 돌고 돌아 더이상 갈곳없이 머문곳이 짚신골이었다니

그 숨어든 길이 구만리는 충분했을것이다 라는 생각도 해 본다.

 

 

 

촬영일 : 2019년 12월 24일(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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