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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안향교(比安鄕校)

도랑도랑 2014. 11. 30. 22:23

 

 

비안향교(比安鄕校)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촌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향교.
소재지: 경상북도 의성군 안계면 교화길 65-14(교촌리 285)

 

1992년 11월 26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63호로 지정되었다.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서 창건연대를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대략 1398년(태조 7) 무렵으로 추정

된다. 향교 건물은 대성전, 명륜당, 광풍루, 정사청 등 9개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량문의 기록에 의하면, 원래 비안읍에 있던 처음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고, 지금 있는 건물은 1608년(선조 41)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또, 《비안면여지승람(比安面與地勝覽)》에는 1610년(광해군 2)에 복원되어 현동에서 안정리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다.


이 향교는 비안면의 선비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는데, 향교의 위치를 여러 번 옮긴 이유는 비안면의 위천이 자주 범람하여 이 선비들이 찾아갈 수 없는 경우가

많아서 보다 안전한 곳으로 옮긴 것이라고 생각된다. 지금도 대성전에 5성(聖)과 22현(賢)을 모시고 매년 봄에 제사를 지낸다.

 

 

 

 

                                                                                                                                                    비안향교 대성전(比安鄕校 大成殿)

 

대성전(大成殿)이란 문묘 안에 공자의 위패를 모신 전각이며,문묘(文廟)란 유교의 성인(聖人)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을 뜻함.

 

중국 당(唐)나라 때 공자가 문선왕(文宣王)으로 추봉(追封)됨에 따라 문선왕묘라고 부르다 원대(元代) 이후로 문묘라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한(漢)나라에서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채택하면서 공자에 대한 국가적 규모의 제사를 행하였다. 처음에는 그 출생지인 궐리(闕里)에 한정되었으며, 수(隋)나라 때까지는

주대(周代)의 문물제도를 정비했다고 하는 주공(周公)이 국학(國學)의 사당에서 선성(先聖)의 자리를 차지하고 공자는 선사(先師)로서 배향(配享)되었을 뿐이다.

그 후 당의 태종이 유교정치를 표방하면서 공자가 선성의 자리에 모셔지고 안회(顔回)가 선사(先師)로 배향되었으며, 송대에 주희(朱熹)가 의리와 명분에 입각한

정통(正統)의 확립을 강조함에 따라 문묘의 향사제도가 정비되었다.


한국에서 공자 사당의 유래는 통일신라 때인 714년(성덕왕 13) 김수충(金守忠)이 당나라에서 공자와 그 제자인 10철, 72제자의 화상(畵像)을 가지고 돌아와

왕명에 의해 국립대학에 해당되는 국학(國學)에 모신 것에서 비롯되었다. 고려시대에도 중국의 향사(享祀)제도를 따라 운영되었으며 주자성리학이 전래됨에

따라 대성전(大聖殿) 건립이나 배향자 정비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정치에서 유학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그 내용이 심화되면서

제도와 운영이 더욱 정비되었다. 중앙에는 성균관, 지방에는 각 군현의 향교에 세워졌는데 제도적으로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의 아래에 있었으나 정치와

유학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현실적인 중요성은 오히려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태종대에 공자에 대해 안자(顔子) ·증자(曾子) ·자사(子思) ·맹자(孟子) 등 4성(四聖)과 그 밑의 10철(十哲)을 배향함으로써 유학의 큰 도통(道通)은 정리가

되었으나, 조선의 학자들을 모시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계속되었다. 사림파(士林派)의 이념적 정치적 승리가 완결된 시점도 광해군대에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이른바 5현(五賢)이 문묘에 종사(從祀)된 때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로도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에 대한 종사 문제는 서인 ·남인의 학맥(學脈)과 연결되어 현실 정치 상황에 직결되어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최종적으로

공자를 정위(正位)에 두고, 좌우에 4성 ·10철 및 중국 송대의 6현(六賢)을 배향하고 동무(東廡)와 서무에 각각 중국의 명현 47위와 한국의 명현 9위를 종사하였다.


광복 후에는 동무와 서무의 중국인의 위판을 땅에 묻고 한국의 명현은 대성전에 올려 모셨다. 현재 성균관에 전해오는 문묘는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1년(선조 34)에 중건하고 중수를 거듭한 것이다.

 

                                                                                                                                                    비안향교 명륜당(比安鄕校 明倫堂)

 

서울의 성균관이나 지방의 각 향교에 부설되어 있는 강학당(講學堂)을 말하며,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맹자』등문공편(滕文公篇)

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성균관의 유생들이 이곳에서 글을 배우고 익혔으며, 또한 왕이 직접

유생들에게 강시(講試)한 곳이 명륜당(明倫堂)이란 뜻이기도 하다.

 

 

                                                                                                                                                    비안향교 광풍루(比安鄕校 光風樓)

 

1716년에 건립된 광풍루(光風樓)는 원래 강궤루(降軌樓)라는 이름의 단층 건물이었는데, 1985년 개축하면서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전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익공계 중층 누각 팔작지붕 건물이다. 외삼문은 전면 3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전면 좌측에 비안 향교 유도 중흥 기념비(比安鄕校 儒道 中興 紀念碑)가

있다. 이 밖에 교직사와 화장실, 협문 및 연못 등이 갖추어져 있다.

 

 

 

 

 

 

 

 

 

 

 

 

 

 

 

 

 

 

 

 

 

 

 

 

 

 

 

 

 

 

 

 

 

 

 

 

 

 

 

 

 

 

                                                                                                                     촬영일: 2014년 11월 30일 (비내리던 일요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