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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 초전리 고인돌(義城 草田里 支石墓)

도랑도랑 2014. 11. 24. 21:54

 

 

의성초전리고인돌(義城草田里支石墓)

경상북도 의성군 금성면 초전리에 분포한다. 유적은 쌍계천 중류 지역으로, 삼국시대 고분군인 대리 고분군에서 서쪽으로 약 700m 떨어진 초전동 초밭마을 앞의

대지상에 분포한다. 고인돌(支石墓) 13기가 북동-남서방향으로 약 5m 정도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으며, 덮개돌(上石)의 크기는 대부분 200㎝ 내외의 중소형이고, 

가장 규모가 큰 것은 241×128×56㎝이다. 형태는 괴석형(塊石形)이 많고, 윗면에 채석흔(採石痕)이 있는 것도 보인다. 쌍계천을 따라 북동쪽으로 1.5㎞거리에 학미동

고인돌 유적이 있다.  (고고학사전 2001.12 국립문화재연구소)

 

 

 

쑥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는 거친 땅 또는 매우 어지럽거나 못 쓰게 된 모양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흔히 쑥대밭이라 하기도 한다. 927번 지방도 의성군 금성면(탑리)

을 막 벗어난 지점 의성 안동 방향 조문국 유적지 이르기 직전 좌측으로 봉양면(도리원)으로 빠지는 도로가 바로 지방도 927번이다.  이곳 삼거리에서 조금 지나다가

보면 고목 한 그루가 좌측에 서 있고 다시 100여미터 지점엔 "초전리고인돌유적지" 라고 쓰여진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최근 이 길을 몇 번 오가면서 호기심은 생겨도 찾아들어가 볼 생각은 하고있지 않고 있다가 십일월 이십삼일 오후 지나던 길에 시간도 넉넉하여 찾아 들어가 보니 군데

군데 바웟돌이 보이고 나즈막히 철책이 둘러져 경계를 나타내고는 있었지만 쑥이자라서 제멋대로 말라버린 상태였는데,  유적지에 관한 안내판 하나 없는 그야말로

쑥대밭 그것이었다.

 

흔히 고인돌 하면 교과서에서나 볼 수가 있었던 탁자형 큰 바윗돌 아래 작은돌로 고여 있는것 만이 고인돌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넓은 들판 과수원과 마늘밭 사이

마른 잡초속에 가려져 있는 큼직 큼직한 바웟돌 몇 개 그것이 바로 초전리고인돌 유적지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봐도 농지주변에 어울리지는 않을 정도로 큼직한 바웟덩어리가 띄엄띄엄 모여 있는 모습만 보아도 바위가 있을만한 조건은 아닌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이 분야의 전문가들은 이러한 경우에 고인돌(지석묘)로 본다는 것이며, 고인돌의 형태로는 북방식과 남방식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고인돌 그 자체는 바로 지석묘라고 생각하면 쉽게 이해 할 수도 있을것 같다.

 

 

 

고인돌 [dolmen, 支石墓(지석묘)] / 한국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 양식.

 

지석묘(支石墓)라고도 부른다. 북유럽, 서유럽, 지중해 연안, 북아프리카, 서남아시아 일대의 신석기시대 묘제로 분포하나, 한국의 고인돌과 직접적인 문화적

관계는 없는 듯하다. 중국 랴오닝성과 산둥반도 및 일본 규슈[九州]에도 분포하나, 한국과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미미하다. 고인돌은 크게 나눠 지상에 4면을

판석으로 막아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올린 형식과, 지하에 묘실을 만들어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대체로 한반도

중부 이북 지방에 집중되어 있고, 후자는 중부 이남 지방에서 다수를 차지하기 때문에, 이들을 각각 북방식 고인돌과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이밖에도

지하에 묘실을 만들었으나 남방식 고인돌과는 달리 돌을 괴지 않고 묘실 위에 상석을 바로 올린 고인돌도 있는데, 이를 개석식 혹은 변형 고인돌이라고 한다.

 

 

 

고인돌의 연구에서는 지하의 묘실 구조와 축조방법을 중시하는데, 연구자에 따라 약간의 견해차이가 있지만 대체로 이렇게 북방식, 남방식, 개석식 등의 3종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북한 학계는 고인돌에는 한 구역 안에 2~3기의 고인돌을 나란히 세우고 상석 높이까지 돌을 덮어 묘역을 구성한 형식의 고인돌과, 전형적인

북방식 고인돌의 두 유형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을 각각 침촌리형과 오덕형 고인돌로 부르며 전자가 시기적으로 더 이르다고 본다.

 

 

 

고인돌 각 형식 간의 시간적 관계에 대해서는 크게 북방식이 앞선다는 설과 남방식이 앞선다는 설이 있으나, 시간적 관계 판단에 필요한 유물이 워낙 미미하기

때문에 확실하게 단언하기 힘들다. 고인돌이 만들어진 시점에 대해서도 아직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있다.


혹자는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치를 근거로 신석기시대에 이미 고인돌이 사용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기원전 8~7세기 이전에 시작되었다거나, 아무리 이르게

보아도 기원전 5세기를 넘을 수 없다는 주장 등을 하여 이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고인돌이 마지막으로 사용된 시기에 대해서는 대체로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인 움무덤[土壙墓]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2세기경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고인돌이 만들어진 문화적 연원에 대해서도 역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데, 지하에 설치된 돌널무덤[石棺墓]이 지상화되어 고인돌로 발전하였

다는 자생설, 만주지방에 분포한 대석붕(大石棚)의 영향을 받아 발생하였다는 설, 남아시아의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유입으로 발생하였다는 설 등이 있다.


고인돌은 제주도를 포함하여 전국에 분포하나, 황해도, 전라도에 가장 밀집되어 있으며 한 곳에 수백 기의 고인돌이 군을 이루어 분포한 경우도 있다. 북방식

고인돌은 한강 이남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데, 전라북도 고창에서 발견된 북방식 고인돌이 최남단의 것이다. 남방식 고인돌은 전라도 지방에 밀집 분포

하며, 경상도와 충청도 등 한강 이남 지역에서도 많이 보인다. 한편, 개석식(蓋石式) 고인돌은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일본 규슈[九州]지방에 분포하는 고인돌은 조몬[繩文]시대 말기에서 야요이[邇生]시대 초기에 걸쳐 등장하는데, 그것들이 한국계 유물과 함께 발견되고 있어,

일본 야요이문화가 한국에서 건너간 사람들에 의해 형성되었음을 암시한다. 고인돌에서는 간돌검과 돌화살촉이 주요 부장품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민무늬토기와 붉은간그릇 등 토기류와 청동기가 부장된 경우도 있다.


그러나 많은 고인돌에서는 유물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해, 고인돌이 세골장(洗骨葬) 혹은 이차장(二次葬)용의 무덤일 가능성도 언급되고 있다. 또한

고인돌 축조에 필요한 거대한 돌의 운반에는 대규모의 인력이 필요로 하였을 것이라는 가정에서, 이것이 족장(族長) 등 지배계급들의 묘(墓)라는 주장도 있다.

 

 

 

 

 

 

 

 

 

                                                                                                                                   촬영일: 2014년 11월 23일 (일요일 오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