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간정(玉磵亭)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에 있는 조선시대 누각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70호
소재지: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별빛로 122(횡계리 439-3)
1992년 7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0호로 지정되었다. 정극, 정철검이 소유 관리하고 있다. 조선 숙종 때 성리학자인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과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 형제가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1717년(숙종 43)에 세운 정자이다.
옥간정은 보현산(寶賢山)을 등에 엎고 정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는데, 일각문을 들어서면 우측쪽에 옥간정이 있고, 좌측에는 풍뢰당(豊雷堂)이 자리잡고 있다.
옥간정은 대지의 고저차를 이용하여 전면은 누형식으로 꾸미고, 후면쪽은 자연석 기단 1단을 돌려 건물을 세웠다.
평면은 정면 3칸, 측면 4칸반인데, 전면의 어칸과 좌협칸은 2통칸의 마루이고 우협칸에는 한칸 온돌방을 두었다. 좌협칸 후면쪽은 온돌방 2칸과 서고 1칸을
두어 전체적으로 ㄴ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전면 온돌방 앞쪽과 우측면 및 마루 좌측면 창문에는 가운데 설주가 있다. 가구는 3량가인데, 기둥 위에 주두
(柱頭)를 얹고 퇴량과 대량을 합보[合梁]시킨 다음 대량 위에 제형 판대공을 세우고 종량을 얹었다.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좌협칸 후면 3칸은 전면 지붕보다 한 단 낮게 꾸몄다.
옥간정(玉磵亭) 담장밖에 가꾸어져 피어있던 쇠비름과의 한해살이풀 채송화(菜松花)
마당의 한켠이나 담벼락 아래 양지바른 곳에서 피어나던 어릴적 기억속의 채송화 정말 오랫만에 보니 동요속의 그 채송화가 바로 이거였구나! 라는 생각에
새삼스럽다. 채송화도 봉숭화도 한창 입니다 ~ 라는 동요가 생각났다. 야생화를 즐겨찾아 보면서 돌나물과의 바위채송화와 잎과 줄기의 모양이 가장 흡사
하지만 바닷가에서 자라는 땅채송화나 높은산 바위 위에서 자라는 바위채송화는 식물분류학상 돌나물과이고 이 채송화는 관상용으로 심어지는 쇠비름과의
한해살이풀이며, 남아메리카가 원산지이다.
보현산(普賢山) 은 선비 문화와 서민들의 삶을 함께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선비들은 횡계천(橫溪川)의 자연을 벗 삼아 횡계구곡(橫溪九曲)을 설정한 뒤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 양성에 전념했고, 서민들은 햇빛과 별빛이 가장 잘 비치는 보현산 자락에 삶의 터전을 일궜다.
선비들의 은거지와 서민들의 삶터는 모두 보현산 하늘길로 이어져 있다. 보현산 하늘길은 횡계구곡길,태양길,구들장길,웰빙숲길,천수누림길 등으로 모두 연결
되어 있어, 저마다 한 폭의 산수화처럼 아름다운 경치와 삶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것이다.
선비들이 횡계천(橫溪川)의 자연을 벗 삼아 횡계구곡(橫溪九曲)을 설정한 뒤 학문에 정진하며 후학 양성에 전념 했다는 횡계구곡(橫溪九曲) 이 궁금했다.
보현산을 내려와서 그 시작점 부터 거슬러 오르며 하나 하나 찾아보긴 했지만 정확한 위치였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제 1곡 쌍계(雙溪) : 횡계교 아래, 청송에서 흘러오는 옥계(玉溪)와 보현산에서 흘러오는 횡계(橫溪), 두 시내가 만나는 곳이다. 쌍계(雙溪)는 영천시 화북면
옥계리에서 횡계리로 가는 입구의 횡계교 아래로 노귀재 쪽에서 흘러오는 옥계와 보현산에서 내려오는 횡계가 만나는 곳이다. 이 지점에 있는 넓은 바위가
반암으로,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형상이라고 했다. 쌍계의 오른쪽에 횡계들판이 있으며 왼쪽에는 옥계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쌍계에서 횡계를 따라 600m 정도 올라가면 제2곡 공암(孔巖)이 나온다. 구멍이 많다는 공암은 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많이 잘려 나가 낮아졌지만, 이전에는
높이 솟아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정만양과 정규양은 공암을 공자바위로 설정하고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제 2곡 공암(孔巖) : 시냇가의 바위에 구멍이 많아 공암이라 했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공암 안에 살고 있는 이무기가 이 바위의 구멍을 통하여 산너머
흐르는 옥계를 오갔다고 한다. 제 1곡인 쌍계(雙溪) 부분을 서성거려 보아도 정확한 지점은 찾을수가 없었고 다시 자동차로 제 3곡인 태고와(太 古 窩) 앞
도로옆 공터에 주차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서 개울로 내려선 후 한참을 내려가 보았지만 키만큼 자란 풀들이 자라나서 더 이상 찾지는 않았다.
공암에서 400여m 오르면 횡계구곡 제3곡인 홍류담(紅流潭)의 절벽 위에 세운 태고와(太古窩)가 나온다. 태고와는 정규양이 35세 되던 1701년(숙종 27)에 건립
했으며 1730년(영조 6) 제자들이 개축해 모고헌(慕古軒)이라 불렀다.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동서남북 사방을 모두 마루로 두른 특이한 평면구조를 이루고 있다.
제 3곡 태고와(太古窩) : 조선 숙종 때 지수 정규양이 35세 되던 1701년에 건립한 누각으로 본래는 태고와(太古窩)라 하였는데 1730년 제자들이 개축하여
모고헌(慕古軒)이라 칭하였다.
태고와 뒤의 횡계서당은 1927년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었다. 정만양과 정규양은 당시 물이 제법 깊은 홍류담에 배를 띄워 달빛 아래 유생들과 뱃놀이를 하며
거문고를 타기도 했다.
제 4곡 옥간정(太古窩) : 훈수와 지수가 학문을 양성하고 후학을 양성하기 위하여 1716년에 세운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4칸 반의 ㄱ자형 누각 건물이다.
태고와 위쪽의 제4곡인 영과담(盈科潭)가에 세운 옥간정(玉磵亭)은 정만양과 정규양이 학문 연구 및 후학 양성을 위해 1716년(숙종 42) 봄에 세운 정자이다.
정자 앞 오른쪽에 300여 년 된 은행나무가 있다. 옥간정 앞에는 요즘도 물길이 20여m에 이르는 작은 소가 있다. 당시 이곳의 바위틈을 막아 작은 못을 만들
었다고 하며, 못에서 뗏목을 타고 거문고를 켜기도 했다.
옥간정의 남쪽 언덕을 격진병(隔塵屛)이라 하고 그 밑의 대를 광풍대(光風臺)라 하였다. 나뭇잎이 떨어진 겨울 옥간정을 찾으면 계곡 건너 언덕의 나무 밑 바위에 새겨진 ‘광풍대(光風臺)’ 글씨를 확인할 수 있는데, 빗물에 글씨의 일부 획이 떨어져 나갔다. 광풍대 서쪽을 지어대(知魚臺)라 하여 낚시하기에 좋다고 했고, 동쪽에 있는 것을 제월대(霽月臺)라 하여 밤이면 좋다고 했다.
제 5곡 와룡암(臥龍巖) : 시내 오른쪽은 수직의 바위가 자리하고 그 바위를 덮은 느티나무가 제법 수령이 오래된 듯하다. 이 굽이에 지수가 횡계 수석의 승경을
사랑하여 35세(1701)에 집을 옮겨 거처를 정하였다.
횡계구곡 제5곡인 와룡암(臥龍巖)은 옥간정에서 150m 정도 올라간 곳의 횡계리 다리 밑에 자리하고 있다. 횡계의 왼쪽 넓은 바위가 와룡암이며, 오른쪽에는
수직의 바위와 느티나무가 보인다. 지수 정규양은 횡계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35세 때인 1701년(숙종 27) 영천 대전리에서 횡계리로 거처를 옮겼다. 먼저
와룡암 위에 작은 집을 지어 ‘육유재’라 이름 붙였다.
제 6곡 벽만(碧 灣) : 옛날에 시내를 건너는 나무다리가 있었다고 하는데 시내의 왼쪽은 넒은 반석이 길게 자리하고 오른쪽은 높다란 바위가 있으며 그 위로
여러 종류의 나무가 자라고 있고 나무그늘이 시내까지 드리운다.
제6곡 벽만(碧灣)은 “바위 사이로 푸른 물이 흐르는 굽이”다. 와룡암에서 350여m 올라가면 시내 양쪽에 넓은 바위가 자리하고, 가운데로 맑은 시냇물이 흐른다.
제 7곡 신제 (新堤) : 마을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현재 횡계저수지 자리에 옛날에 제방이 있었다고 하며 일제강점기에 기존의 제방이 있던 지점에 둑을 막아
현재의 저수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저수지 수로부분에 기이한 바위가 많고 저수지 끝 부분에 기이한 바위의 윗부분이 남아있어 이곳이 신제(新堤)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제7곡 신제(新堤)는 현재의 횡계저수지 제방 지점이다. 훈수와 지수가 횡계에 거주했을 때 이미 만들어진 제방이다. 일제 강점기에 기존의 제방이 있던 곳에
둑을 막아 지금의 횡계저수지를 만들었다.
제 8곡 채약동(採藥洞) : 횡계저수지 왼쪽에 난 도로를 따라 저수지 끝지점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는 산발치에 이르는데 이 부분이 채약동이다. 횡계저수지가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이 굽이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제8곡 채약동(採藥洞)은 횡계저수지 끝의 오른쪽 건너편에 보이는 소나무 군락 지점이다. 횡계저수지가 축조되기 전에 이곳에 사람들이 밭을 일구며 살았다고
한다. 횡계저수지에 수몰돼 마을과 골짜기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제 9곡 고암(高巖) : 고암은 고산사(高山社)를 의미한다. 지수는 1707년, 41세에 고밀곡(高密谷) 안에 고산사를 창건하였는데 여러 유생들이 왕래하며 강마(講摩)하는 장소로 삼았다. 이 고산사를 후손들은 고밀서당(高密書堂)이라 하고 서당이 자리 했던 굽이를 서당골이라 하였다.
횡계구곡 제9곡은 고암(高庵)으로, 고산사(高山社)를 의미한다. 지수 정규양은 대전리에서 횡계로 거처를 옮긴 지 6년 후인 1707년(숙종 33) 고산사를 창건해
유생들을 가르쳤다. 후손들은 고산사를 고밀서당(高密書堂)이라 하고, 서당이 있던 곳을 서당골이라 한다. 채약동에서 자하봉 산길을 따라 500여m 올라간
지점에 있었지만, 지금은 터만 남아 있다.
촬영일: 2014년 06월 0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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