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위 삼존석굴(軍威三尊石窟)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缶溪面)에 있는 통일신라 초기의 화강석 석굴.
인근 사람들은 군위의 삼존석굴을 제2석굴암이라고 부르기도한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모태가 된 곳으로 경주의 것보다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문화재이다. 경주의 석굴암이 인공으로 석굴을 만들고 그 안에 부처를 모셨다면, 이곳은 자연석굴을 그대로 이용해 사원으로 꾸민 것이 특징이다. 석굴은 아파트 한 동 크기만한 바위 아래쪽에 만들어져 있는데 그 안에는 2m가 넘는 크기의 본존불이 있고 좌우로 사람 키만한 협시보살이 자리하고 있다. 본존은 손가락으로 땅을 짚고 있는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데, 이는 석가여래 전통의 지권인으로 우리나라 불상들에서 발견되는 최초의 모습이라고 한다.
경주 석굴암과 비교하게 되는데 조각의 수법이나 석굴의 구조를 볼 때 정교함이나 아름다움에서 경주의 것보다 떨어진다고도 한다.
하지만 군위 삼존석굴은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로 넘어가는 과정에 만들어진 과도기적 작품으로 바위에다 그대로 새기는 마애불에서
인공석굴을 만들어 부처의 조각상을 앉히는 과정의 중간 형태로 의미를 가진다. 경주와 마찬가지로 예전에는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었
으나, 지금은 앞에 마련된 조망대에서만 바라볼 수 있다. 삼존석굴 앞마당에는 모전석탑이 있는데, 탑이라고 하기에는 단층의 그 모양이 특이하다. 돌을 쌓아 만든 삼층탑이었으나 한 번 무너진 것을 1949년에 지금의 모양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안타깝게도 활자본만 전한다고 한다. 어디에 묻혀있는지는 모르지만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정확한 편찬 연대도 알 수 없다고도 하는데. 다만 일연 스님이 인각사에 내려온 즈음에 편찬한 것이 통설이다.
육당 최남선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 하나를 택하여야 할 경우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더불어 우리 고대사 서술의 양대산맥을 이루는 보배이다. 그러면서 정사인 삼국사기가 간과했던 소중한 것들을 우리에게 남겼다는 것이다.
삼국유사 저술 당시 시대 상황은 암울했다. 무신정권이라는 내우(內憂)가 채 아물기도 전에 몽고의 침입이라는 외환(外患)을 겪게 된다.
고려는 원(몽고)나라의 부마(사위)국으로 격하됐고, 왕과 백성들의 핍박당함은 상상을 초월했다. 수십년 백성들이 수난을 겪는 동안
민족의 자주성을 되찾으려는 의식이 살아났고, 몽고를 상대로 한 30년 민족 대항전 속에 역사의식 또한 불타올랐다. 이러한 당시 시대 상황은 일연 스님의 손을 빌려 민족의 역작을 낳게 한 것이라고도 했다.
고려 후기의 고승으로 경북 경산에서 출생한 일연(1206∼1289)은 노년에 어머니를 모시고 군위 인각사에 머물면서 역사서인 삼국유사를 편찬(충렬왕 7년·1281년)하고 그곳에서 입적했다. 국보 제306호인 삼국유사가 700여년 전 군위(인각사)에서 보각국사 일연 스님에 의해 편찬됐다는 점을 널리 알려 지역 홍보 및 관광객 유치를 극대화하겠다는 전략에서 2009년 3억원을 들여 차량 통행이 잦은 군위읍 서부리 중앙고속도로 군위 IC 입구에 군위가 삼국유사의 고장임을 알리는 내용을 담아 설치한 대형 조형물(가로 7m 세로 5m)을 사진으로 담아봤다.
군위삼존석굴모전석탑 (軍威三尊石窟模塼石塔)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41호
소 재 지: 경북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 302
1991년 5월 14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41호로 지정되었으며, 제2석굴암으로 더 잘 알려진 삼존석굴사(국보 109) 경내에 있다.
통일신라시대 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하며, 탑신부는 다시 축조되어 원형에서 다소 변형되었으나 그런대로 탑형을 유지하고 있다. 단층 기단(基壇) 위에 단층의 탑신부를 형성한 특이한 석탑이기도 하다.
공식명칭 군위삼존석굴석조비로자나불좌상
한자명칭 軍威三尊石窟石造毘盧遮那佛坐像
경상북도 군위군 부계면 남산리에 있는 불상으로 현재 대좌(臺座)와 광배(光背)가 없어진 상태다. 머리에는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그 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은 펑퍼짐하게 표현하였다. 볼에 살이 올라 풍만한 얼굴은 길게 늘어진 두 귀와 함께 양감을 느끼게 한다. 옷은 양 어깨를 감싸 입고 있는데 앞가슴을 넓게 드러내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모습으로 일반적인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손모양이다. 각 부분의 모습에서 양감을 느낄 수 있으며 형식으로 보아 9세기 말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촬영일: 2014년 1월 3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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