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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충신 박제상과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

도랑도랑 2012. 11. 30. 01:02

지난 해 이맘때 쯤 이었을까? 정확하게는 2011년 12월 27일 이었다.

우연한 기회가 생겨 지나던 길에 치산서원지인 신라충신 박제상 유적지를 돌아보면서

치술령을 올라 망부석을 돌아 볼 수가 있었다.

 

치술령은 망부석으로 잘 알려져 있는 곳인데 박제상의 부인이 딸 들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왜쪽을 바라보며 통곡을 하다 죽었는데 그 몸은 죽어 망부석이 되고 영혼은 새가되어 은을암에

숨었다는 전설이 전해 져 내려 오는 곳이기도 하다. 치술령에는 경주쪽에서 말하는 치술령 망부석과

울산쪽에서 말하는 망부석이 있다.

 

그런데 경주 - 울산간 7번 국도 주변에 박제상 관련 유적지가 있다는것 

지난 10월 14일 7번 국도를 지나다가 망덕사지를 구경 하려고 화랑수련원으로 들어가면

화랑교라는 작은 교량이 하나 나타난다. 교량 앞 좌측 작은 제방둑으로 승용차 한 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농로를 따라 100m정도 내려가면 제방둑엔 비석이 하나 외로히 서 있다.

거기엔 한자로 쓰여진 "長沙 伐知旨" 라고 쓰여진 까만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길 장(長)자에 모래 (沙)자 제방 아래 흐르는 강이 남천이고 이곳에 장사라는 이름이 붙은것은

삼국유사에서는 박제상의 부인은 목을 길게 늘이고 울었다.

 

고구려에 가서 눌지왕의 아우 복호를 구출해온 박제상이 이번에는 왕의 다른 동생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집에도 들르지 않고' 왜국으로 출발한다는 소식을 시중에서 전해들은 그의 아내는

남편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고 뒤를 쫓았으나 이미 지아비는 저 멀리 사라져간 뒤였다.

 

죽음의 땅인 바다 너머로 떠나가는 남편을 뒤쫓다가 쓰러진 아내는 남천 모래밭에서 목을 길게 늘이고

울었으니 뒷날 사람들은 이곳을 '장사'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제방에서 만난 長沙 伐知旨 라고 쓰여진 돌 비석 이 표석은 석굴암 연구회가 세운 것이라고 하는데 석굴암 연구회는

신라역사 과학관을 경주 공예촌에 건립할 무렵 관장인 석우일 선생이 사재로 건립한 것이라고 한다.

가을 추수가 막 시작 되는 싯점 이라서인지 누렇게 출렁이던 황금들판에도 하나 둘씩 벼가 베어진 모습들이 눈에 뜨였고

아래 논둑길 따라 들어갔던 소나무 숲이 있는곳이 망덕사지 당간지주가 있는곳이고 바로 그 뒤쪽으로 망덕사지가 저녁

노을빛에 펼쳐져 보였다.

 

 

 

 

고구려와 왜국을 오가며 왕제들을 귀국시킨 박제상
그러나 박제상은 왜국에서 불에 태워져 처형되고, 그의 부인은 치술령에 올라 목놓아 울며 남편을 기다리다가 마침내 죽어

돌로 변해버린다. 그 돌을 '망부석(望夫石)'이라 하고, 그녀의 혼이 새가 되어 날아가 숨어버린 바위를

'은을암(隱乙岩)'이라 한다. 남편[夫]을 기다리다가[望] 돌[石]이 되었으니 그 돌의 이름은 망부석이 되었고, 새[乙]가 되어

암벽[岩] 속에 숨었으니[隱] 바위의 이름은 은을암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게 슬픈 사연을 간직한 망부석과 은을암은 지금도 치술령에 오르면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촬영일: 2012년 10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