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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대왕 장릉

도랑도랑 2020. 8. 17. 17:57

 

장릉(莊陵)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33-1번지에 있는 조선 제6대 왕 단종의 무덤이다.


조선 제6대 왕 단종(端宗 1441~1457, 재위 1452∼1455)의 무덤으로,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196호로 지정되었다.
세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에서 죽음을 당한 후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영월의

호장(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몰래 수습하여 동을지산 자락에 암장하였다.


오랫동안 묘의 위치조차 알 수 없다가 1541년(중종 36) 당시 영월군수 박충원이 묘를 찾아내어 묘역을 정비하였고,
1580년(선조 13) 상석·표석·장명등·망주석 등을 세웠다. 1681년(숙종 7) 단종은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고,
1698년(숙종 24) 11월 단종으로 추복되었으며, 능호는 장릉(莊陵)으로 정해졌다.


장릉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세우지 않았으며, 석물 또한 단출하다. 봉분 앞에 상석이 있고, 상석 좌우에 망주석 1쌍이

서 있으며, 그 아랫단에 사각형 장명등과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이 있으나 무인석은 없다.


묘가 조성된 언덕 아래쪽에는 단종을 위해 순절한 충신을 비롯한 264인의 위패를 모신 배식단사(配食壇祠), 단종의 시신을

수습한 엄흥도의 정려비, 묘를 찾아낸 박충원의 행적을 새긴 낙촌기적비, 정자각·홍살문·재실·정자(배견정 拜鵑亭) 등이 있다. 왕릉에 사당·정려비·기적비·정자 등이 있는 곳은 장릉뿐인데 이는 모두 왕위를 빼앗기고 죽음을 맞은 단종과 관련된 것들이다.

 

 

 

낙촌비각(駱村碑閣)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087번지 장릉 경내에 있는 비석으로 박충원이 단종의 묘를 찾아낸 사연이 기록되어 있다.


단종의 묘인 장릉(莊陵, 사적 제196호) 경내에 정면·측면 1칸 규모의 작은 비각이 있는데, 그 안에 낙촌기적비(駱村紀績碑)가 보호되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낙촌 박충원(朴忠元 1507~1581)이 영월군수로 재임할 때 단군의 묘를 찾아냈던 사연을 기록한 비석이다. 1974년 5월 박충원의 후손들이 건립하였으며, 비문은 유학자 성낙서(成樂緖 1905~1988)가 썼다.


비문에는 ‘단종이 죽자 엄흥도(嚴興道 ?~?)가 시신을 찾아 황량한 산골에 암장하였는데 엄흥도가 죽고 난 후에는 묘조차 알 길 없었다. 그 후로 영흥고을에 군수가 부임하면 원인 모르게 죽어갔는데 목숨을 잃은 이가 무려 7명이었다.
중종 36년(1541) 박충원이 군수로 부임하였다. 비몽사몽간에 세 사람에게 끌려가보니 숲속에 여섯 신하가 어린 임금을 모시고 있었다. 임금은 처형을 명하였으나 신하 중 한 명이 살려두자 아뢰어 죽음을 면하였다. 잠에서 깬 박충원은 꿈속의 일이 단종과 연관되어 있음을 깨닫고 엄흥도의 후손을 앞세워 단종의 묘를 찾은 후 묘를 정비하고 제사를 올렸다. 그 후 군수가 부임 초에 죽어가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엄흥도정려각(嚴興道旌閭閣)

엄흥도정려각은 1726년(영조 2)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단종의 시신을 안장한 엄흥도의 정문이다.
비석 전면에는 「조선충신 영월군호장 증자헌대부공조판서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관 증충의엄흥도지문」이라 하였다.
비석은 1833년(순조 33년)에 가필하여 같은 해에 또 다시 증축하였으며 1876년 (고종 13년)에 고종이 증시하기를 ’충의’라 하여 1879년 (고종 16년) 비석에 있는 것을 다시 고쳤다고 한다.

 

 

 

 

 

 

장판옥(藏版屋)

이 건물은 정조 15년(1791)에 건립한 것으로 단종(端宗) 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86인, 환자군노(宦者軍奴) 44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8인의 위패(位牌) 를 모셔놓은 곳이다.

 

 

 

 

배식단(配食壇)

배식단은 장릉(莊陵)의 정단과 별단에 배식한 268위의 제단이다.
단종이 복위된 이후, 1791년(정조 15)에 처음으로 정위 32인과 별단의 제위 198인을 지정하였다.
이 배식자 숫자는 그 후 순조 연간 이래 추가되어 268위로 증가하였다.
제사의 시일은 한식 때이며, 그 축문은 정조가 직접 지었다.
제단은 정단과 별단을 구분하였으며, 별단은 공로의 다소와 신분에 따라 셋으로 나누었다.

 

 

 

 

 

수복실(守僕室)

수복실은 능(陵)과 경내(境內)를 관리하던 능지기의 처소(處所)이다. 
숙종 25년(1699)에 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하고 영조 9년에 비각과 수복실 정자각을 세웠다.

 

 

 

 

 

 

단종비각(端宗碑閣)

영조9년 (1733)에 어명으로 단종대왕릉비(端宗大王陵碑)와 비각(碑閣)이 건립되었다.
단종대왕릉비는 1698년(숙종24)에 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하면서 세운것으로
비석 앞면에는 「조선국단종대왕장릉(朝鮮國端宗大王莊陵)」이라는 글이 음각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단종대왕(端宗大王)의 생애가 기록되어있다.

 

 

 

 

 

정자각(丁字閣)

조선 왕릉의 정자각은 능에서 제사지낼 때 사용하는 중심 건물로 그 모양이 ‘丁’자와 같아 ‘정자각(丁字閣)’이라고

불렀다. 정자각은 봉분 아래에 있으며, 정자각 앞으로는 박석을 깐 삼도(三途)가 있고 삼도 맨 앞에는 홍살문이 놓인다.
정자각 좌우로는 수라간과 수복방이 대칭으로 놓여 정자각 제례에 필요한 간단한 준비를 할 수 있다.
물론 본격적인 준비는 홍살문 밖에 있는 재실에서 이루어진다. 조선왕릉 정자각의 연원은 고려시대에서 찾을 수 있으나

그 이전의 정자각 형태는 아직 밝혀진 바 없다.

 

 

 

 

 

 

수라간(水刺間)

수라(水刺)는 원래 몽고어(蒙古語)로서 탕미(湯味)를 뜻하며, 수라를 짓는 주방(廚房)을 의미한다. 어주(御廚).

 

용례(用例)

정침청이 3간, 동서 침전이 각 2간, 동서 친랑이 각 2간, 남천랑이 6간,

동서 소횡랑이 각 5간인데, 동서 행랑에 접하였고 그 나머지는 양전의

수라간•사옹방 및 탕자세 수간 등 잡간이 총 1백 18간인데, 이상은 내전이다.

 

 

 

 

 

 

영천(靈泉)

영천(靈泉)은 장릉(莊陵)에서 제사 지낼 때 쓰는 제정(祭井)으로 1791년(정조15)에 부사 박기정이 조정에 고하고

사용해 오는 제정으로 영천이라는 비석이 있다. 일설에는 보통 때에는 물이 조금씩 샘 솟으나 제사를 지내는 한식 때가 되면 물이 많이 솟는다고 하여 매한식시수출(每寒食時水出)이라는 말이 전해 오고 있다.

 

 

 

 

 

 

 

단종비각(端宗碑閣)

 

 

 

수복실(守僕室)과 홍살문 밖의 장판옥(藏版屋)

 

 

배식단(配食壇)

 

촬영일 : 2020년 08월 14일(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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