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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강천의 애절한 사연 충비순량순절지연(忠婢順良殉節之淵)

도랑도랑 2019. 12. 30. 08:41

 

북미질부성(北彌秩夫城) 아래의 참포관소(塹浦官沼)

 

포항에는 충절을 지킨 ‘충비(忠婢)’ 구룡포의 충비 단량, 곡강천과 충비 순량, 연일읍의 충비 갑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노비의 신분을 뛰어넘은 충절, 의리, 그리고 절개 충비순량순절지연(忠婢順良殉節之淵) 애절한 사연이 곡강천(曲江川)에 서려있다.

 

몇 일전 낚시 가던길에 포항시 남구 구룡포읍 성동리 광남서원(廣南書院)을 둘러보고 충비(忠婢) 단량(丹良)에 관한 내용을 찾아보면서 포항에는 충절을 지킨

세 충비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곡강천(曲江川)의 충비 순량의 유적이 가까운곳에 있다는 사실도 알게되면서 칠포리암각화와 함께

하루의 일정으로 돌아보게 되었다.

 

 

 

예로부터 이 곳 곡강 하구를 토지하(吐只河) 또는 참포(黲袍)라고 불렀는데, 신라시대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던 동독(東瀆)이 있었던 자리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던 전국의 명산대천에 국가가 직접 제사를 지내는 제도를 마련하였고, 이를 대사 중사 소사로 구분 하였다. 특히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던 네 개의 강을 신라 사람들은 '독(瀆)'이라고 불렀다. 그 중 동쪽에 있던 이곳 참포를 동독이라 하였고, 현재 경남 양산시 황산강을 남독, 공주의

금강을 서독, 서울의 한강을 북독이라 부르면서 4독에 대한 제사는 중사(中祀)에 포함시켰다.참포 아래 해안 백사장을 봉림사라 한다. 남쪽 방목산에 국가에서

관장하던 목장이 있었는데, 효종 을유년에 장기로 옮겨 북목(北牧)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 제사지』, 『일월향지』

 

 

 

토지하(吐只河)
강 이름. 신라시대에 중사(中祀)를 지내던 사독(四瀆)의 하나인 동독(東瀆).

지금의 경상북도 포항시(浦項市)에 있는 곡강천(曲江川)으로 추정된다. 槧浦.

 

참포(黲袍) 
제례(祭禮)를 올릴 때에 임금이 입는 옅은 청흑색의 겉옷.


동독(東瀆)
조선 시대, 사독의 하나

 

대사(大祀)
조선 시대, 임금이 직접 지내던 나라의 큰 제사

 

중사(中祀)   
고려와 조선 시대에 나라에서 지내던 제사의 하나

 

소사(小祀)
조선 시대, 나라에서 지내던 소규모의 제사

 

 

 

이곳에 오기전 블로거들이 쓴 내용들을 읽어보고 나서 이 장면을 마주하니 낯 설지않은듯 금방 찾아낼수 있을것도 같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우측에 있던

하수종말처리장 이란 단어가 자꾸 떠오르면서 선뜻 내려서기는 망설여 졌지만 그늘진 건너편 건물의 정수장이란 이름표를 보고는 어느정도 청량감을 주는듯한

기분도 들었다.

 

 

 

곡강천(曲江川)의 충비순량순절지연(忠婢順良殉節之淵)

 

충비 순량의 비석은 포항시 북구 칠포해수욕장으로 흘러드는 곡강천 하류의 한 야산 암벽에 조각되어 있다.
순량의 암벽 비석은 인조 8년(1630) 순량의 미담을 전해들은 흥해군수 조성에 의해 제막됐다. <영남일보 DB>
유서 쓰기를 마친 처녀는 원망하듯 마당 끝의 하늘을 쳐다보았다.

애써 입술을 깨물었지만 눈물이 방울지어 흘러내렸다. 그녀로선 어쩔 방도가 없었다.
관아에 끌려가게 되면 자신은 물론 가문에 커다란 누를 끼치게 될 터였다. 그렇다고 혼자 도망칠 수도 없었다.
자탄에 빠진 그녀의 머리에 한 양반 사내의 가증스러운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낮에 그녀는 풍광이 아름다운 흥해 곡강 어귀에 봄나들이 겸 빨래를 나갔다.
얼마 지나서 강가에 한 양반 사내가 나타났다. 작은 체수에 갓을 쓴 모습이 왠지 천박하고 음탕해 뵈는 사내였다.
몇 번 말을 걸어도 모른 체했더니 자신의 알량한 지식을 뽐내기나 하듯 시를 한 곡조 읊는 게 아닌가.

 

‘너는 삼척검도 아니면서 몇 장부의 애간장을 끊었느냐’는 다분히 희롱조의 시였다.
노는 짓거리가 한심해 보여 그녀는 ‘나는 중국 형남(荊南)의 화씨벽(和氏壁) 같은 보배로 우연히 곡강두(曲江頭)에 유랑하지만
어찌 계림의 썩은 선비와 같이하리’라는 뜻의 시를 읊었다. 그게 불찰이라면 불찰이었다.

 

양반 사내는 흥해군수와 친구 사이로 며칠간 유람차 와 있었다.
일개 평민 아녀자에게 무안을 당한 것에 모욕감을 느낀 사내는 곧장 흥해군수에게 이 일을 알렸고,

친구의 수모를 자신의 일로 받아들인 흥해군수는 대로하여 처녀를 잡아들이라는 명을 내렸다.

이때 미리 이를 엿듣게 된 안면 있는 사령 하나가 달려와 어서 도망치라며 그녀에게 일러주고 갔던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도는 없었다. 몸을 일으킨 처녀는 몸종을 찾았다.
어릴 적부터 그녀를 보살핀 충직하고 심성 착한 몸종으로 이름이 순량(順良)이었다.
유서를 건넨 그녀는 순량의 만류를 뿌리치고 곡강으로 달려갔고, 북미질부성 아래의 참포관소(塹浦官沼) 깊은 물에 몸을 던졌다.
뒤를 쫓아간 순량 역시 주인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강물에 몸을 던지고 말았다.

 

이 사연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30여 년이 흐른 후인 인조 8년(1630)이었다.
사연을 듣게 된 신임 흥해군수 조성(趙)은 이씨 처녀와 충비 순량이 투신한 절벽 바위에 비를 세우도록 하고 손수 비문을 지었다.
그것은 종의 신분으로 주인을 따라 순사한 순량의 충절을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한 조치였다.

 

 

 

 

 

 

 

 

포항시 북구에는 바다와 함께 흥(興)한다는 흥해읍(興海邑)이 있다.
조선 제18대 선조대왕 재위 16년의 어느 따사로운 봄날에, 경상도 흥해군에 새로 부임한 군수에게 친구 중의 한사람인 계림(鷄林 : 오늘의 경주) 일사(逸士 :

세상일에 초월한 선비)가 신임을 축하할 겸 유람차 군수를 찾아와서 여기저기 명승지를 찾아 여러 날 묵으며 노닐고 있었다. 이곳 흥해군에는 풍광이 뛰어난

곡강(曲江)이 흐르고 있는데, 중국에도 이러한 이름의 곡강이 있다. 당나라 시대에 두보(杜甫)가 즐겨 찾던 곡강에서 여러 편의 시를 읊었으니, 저 유명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는 구절도 그 곡강을 거닐면서 읊조린 구절이다.

 

흥해군의 곡강 또한 그 풍광이 뛰어나서 절경이라는 말을 듣고, 흥해 군수를 찾아온 친구는 매일같이 이 곡강의 언저리를 거닐면서 기암절벽 밑에 흐르는 물의

빼어난 경치를 감상하며 거닐고 있던 차, 흥해의 명승지 북미질부성(北彌秩夫城 - 흥해읍 북편에 있는 신라의 성) 아래 곡강의 어구에 이씨 집안의 한 낭자가

화사한 봄옷을 입고, 따사로운 햇빛을 받아가며 아름다운 자태로 빨래를 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하늘의 선녀가 내려온 것 같은 그림 같았다. 소요를 즐기던

선비는 빨래하는 낭자의 자태가 하도 아름다워 가까이 접근하여 희롱할 생각으로 시한수를 크게 읊었다.

 

이비삼척검(爾非三尺劍) 그대는 석 자 길이의 긴 칼이 아닐진대
능단기인장(能斷幾人臟) 어느 사람 몇 명의 애간장을 끓였는고.

 

빨래하던 이 낭자는 들려오는 이 시 구절의 내용을 모를 리가 없었다. 때가 화창한 봄이라고는 하나, 군수의 친구라는 사람이 이미 며칠을 두고 강물을 구경한다는 문을 이미 들은바 있는 낭자인지라,  바쁜 세상을 한가롭게 노니는 것이 이미 마음에 거슬리던 차에 눈길 한번 주지도 아니하고 시답(侍答) 하기를

 

아조형남화씨벽(我肇荊南和氏壁), 내 일찍이 중국 땅 형남의 보배로운 옥덩이 건만
진성십오유불역(秦城十五猶不易). 진나라의 열다섯 성과도 바꿀 수 없었느니라
우연류랑곡강두(偶然流浪曲江頭), 우연찮게 곡강의 강가에 유랑의 신세이언만
황거계림일부유(況擧鷄林一腐儒). 어찌하여 계림의 한 썩은 선비와 함께 하리오 ~ 라고 신랄(辛辣)하게 꾸짖는 시답(詩答)으로 응수하였다.

 

화씨벽(和氏壁)이란 화씨지벽옥(華氏之壁玉)의 준말로 중국의 고대 역사에서 가장 크고 값진 보배로운 옥덩어리를 말한다.

 

 

 

한편으로, 무안당한 계림선비 그 마음속은 어땠을고 ?
이 낭자의 유창하고 조롱 섞인 시 문장에 얼굴에 땀이날 정도로 모욕감을 당했으니, 답구(答句) 마저 못 보내고, 여지없이 황망하게 말을 몰아 군수에게 달려가서
전후 종말을 황급하게 말을 하니, 흥해 군수 생각하기를 지배계급 있는 자로 미개촌락 아녀자의 높은 글에 당한 모욕 참지 못하여 분개하고. 군수친구 대노하여

미개촌락 낭자로서 문무겸한 양반에게 교만 무례한 행동 벌하라고 요청하니, 흥해군수 영을 내려 군노사령 불러 세워 지금 당장 이씨낭자 체포하여 대령하라

명하노니, 명령받은 군노사령 뛰어가며 생각하기를, 양반네들 도도한들 제 얼마나 도도한고? 이 낭자의 죄라한들 시를 써서 답한 죄뿐인데, 군노사령 양심 있어

흥안리에 도착하여 이장에게 이 낭자의 체포명령 전달하며 비밀리에 멀리 도피토록 권유하고, 돌아와서 이 낭자는 원지(遠地) 출타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낭자는 소식 듣고 시름 속에 생각하기를 일신모욕 참겠으나, 봉건사회 벼슬아치 양반네들 해 끼침이, 부모에게 미칠까봐 하늘 보며 한탄하고 청산 보며 탄식

하니 요놈 세상 계급사회 누굴 보고 원망하랴. 양반 상놈 봉건사회 의사표시 허락 안돼 몹쓸 세상 저주하며 항거의 길 번뇌 고민 탈출구는 죽음 밖에 그 무엇이 또

있을 고. 부모에게 눈물로써 유서 한 장 써 가지고 몸종에게 전해주니 몸종 이름이 순량(順良)이라 이 낭자는 몸종에게 마음속의 분개함과 항거의 뜻 말을 하고

곡강 어귀 참포관소(塹浦官沼) 푸른 물에 몸을 던져 천추의 한 못 풀고서 아까운 목숨 죽어가니, 몸종인들 그 광경을 어이 참고 그냥 볼 고, 그 옆에는 몸종이 난

어린 아들 보채면서 지어미를 말리면서 물에 투신 못하도록 울며 불며 말렸으나, 어린 아들 달래여서 집에 보낸 후에야 이 낭자의 억울함과 종의 신세 항거하며

푸른 물속 깊은 곳에 몸을 던져 이 낭자의 시신안고 설은 목숨 자결하니 이게 바로 순사(殉死)로세, 이것이 기해사월(己亥四月) 이십사일 일세.

 

 

 

삼십년이 지난 뒤에 인조 임금 때에 조성(趙?)이란 흥해군수가 새로 부임하여 와서 이 이야기를 듣고서는, 비록 종의 신세지만 주인 따라 순사한일 가련하고

애절한 정 길이길이 기리고 저 순사(殉死)하신 그 자리의 기암괴석 한 가운데 층암절벽 다듬어서 순량의 비 세워 줄 제,

인조팔년(仁祖八年) 길일 받아 건비위령(建碑慰靈) 진혼추도(鎭魂追悼) 문장낭독 하올 적에 당대 없는 명문으로 듣는 사람 구곡간장 도려내고 참포 양쪽 언덕에

날으는 새 한 마리 없고, 벌레마저 울지 않아 숙연함이 드러났다네.진혼추도 그 문장을 곡강 서원 깊은 곳에 보관 중에 고종무진(高宗戊辰)년 대원군 서원

철폐 때 곡강 서원 철폐되니 문장 또한 영원히 분실하여 오늘에 못 전하니 유감이라...


그러나 순사한 계집종 순량의 비석과 비문은 오늘까지 전해오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銘曰 비문에 이르되
順良郡北興安里 / 순량은 흥해군의 북쪽 흥안리에 사는 이 낭자의
李娘婢也, / 몸종이었다.
娘有幽恨沒于是淵, / 이 낭자에게 극한 슬픔이 있어 이 연못에 빠져 죽으니
婢欲下從, / 몸종도 이 낭자의 뒤를 따르려고 하였으나
憫其稚子隨 / 그 어린 아들이 민망스럽게 따라와 보챔으로
後誘使歸家卽, / 달래여 집으로 돌려 보내고 난 이후에
赴淵抱娘屍而乃, / 연못에 다 달아 이 낭자의 시신을 안고 순사 하였으니.
己亥四月 二十四日也, / 그날이 기해년 사월 이십사일이라
崇禎 三年 丙戍 八月 日. / 숭정 삼년 병술 팔월 일.
行興海郡守趙 書而識, / 흥해 군수 조성은 비문을 짓고 쓰다.
色吏 鄭昌臣, / 내력을 밝힌 아전, 정창신
石手 尹湯伊, / 석공, 윤탕이
治匠 金起元. / 자연 암반을 다듬은 사람, 김기원.

 

 

 

 

 

 

 

 

 

 

 

 

 

북미질부성 (北彌秩夫城)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흥안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토성이다.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흥안리의 곡강천 절벽 위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일명 조봉대(釣奉坮)라고도 한다. 둘레는 약 500m이며, 서쪽으로 4㎞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남미질부성과 같은 시기인 504년(신라 지증왕 5)에 건립되었다. 성 내에는 많은 토기 조각이 흩어져 있고 수십 기의 묘지가 형성되어 있다. 1011년

(현종 2)에 흥해읍성이 축조되면서 주변 성으로 전락하였으며, 조선시대 중엽까지 동북 해적을 막는 기지 역할을 하였다. 축조 당시에는 둘레 5,500척(尺)에 연못 한 곳과 3개의 우물이 있었다고 전하나 현재는 흔적만 남아 있다.

 

 

 

 

 

 

 

 

 

 

 

 

 

 

 

 

 

촬영일 : 2019년 12월 28일(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