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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에서

도랑도랑 2012. 2. 13. 22:28

 

 

 

 

보물 제310호 창녕 석빙고

창녕군 교육청 앞의 개울 건너편에 언덕처럼 보이는 것이 이 석빙고이다.

석빙고는 얼음을 저장해 두기 위해 돌을 쌓아 만든 창고로, 주로 강이나 개울 주변에 만들어진다.

서쪽으로 흐르는 개울과 직각이 되도록 남북으로 길게 위치하고 있으며, 입구를 남쪽으로 내어 얼음을 쉽게 옮길 수 있도록 하였다.

 

입구 안의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밑바닥은 경사졌고 북쪽 구석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구멍을 두었으며, 바닥은 네모나고 평평하다.

내부는 잘 다듬어진 돌을 쌓아 양옆에서 틀어올린 4개의 무지개모양 띠를 중간중간에 두었다.

각 띠사이는 긴 돌을 가로로 걸쳐놓아 천장을 마무리하였다. 또한 천장의 곳곳에는 환기구멍을 두어 바깥공기를 드나들게 하였다.

 

이 석빙고는 입구에 서 있는 비석의 기록을 통해 조선 영조 18년(1742) 당시 이곳의 현감이었던 신후서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을 알수 있다.

각 부 양식 또한 조선 후기의 모습이 잘 담겨져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창녕객사(昌寧客舍)

객사는 조선시대의 지방 관아건물로 고을 수령이 임금의 위패를 모시고 예를 올리는 정당과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좌·우헌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고 1924년 군수 이장희가 시장용 건물로 쓰기 위해 창녕읍 술정리로 옮겼다가

1988년 이곳 만옥정에 옮기고 보수했다. 앞면 3칸·옆면 3칸의 1층 건물로, 지붕 옆모습이 사람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바닥은 따로 마련하지 않고 기단 위에 곧바로 세웠으며 기둥 사이에는 벽을 쌓지 않아 주위의 경관을 볼 수 있게 했다.

앞면을 제외한 나머지 면들의 기둥 사이에 나무 2개를 가로로 설치해 행사 때 발이나 병풍을 치기 쉽게 했으며, 건물 전체에

쇠못을 사용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지어진 건물양식으로 보아 조선 후기의 건물로 추측된다.

 

 

퇴천 삼층석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0호

민가 안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69년 10월에 해체, 보수하여 창녕의 만옥정 공원으로 옮겨 세웠다.

탑이 있던 마을 주변에서 기와조각과 자기조각들이 발견되어 사찰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나, 절이름이나 역사를 전하는

기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탑은 2층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위 ·아래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수평을 이루던 처마의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 있으며,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통일신라 후기에 세운 것으로 추정되며, 기단의 일부가 약가 파손되기는 했지만

통일신라의 석탑 변천 과정을 밝히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창녕현감비군(昌寧縣監碑群)

신라 진흥왕 23년부터 조선 말 사이에 창녕에 부임한 현감,부사,어사.관찰사들의 선정비(善政碑)
20여 기이다. 창녕군 곳곳에 흩어져 있던 비석들을 1970년 5월 30일 현 위치인 만옥정공원 내로 옮겨
한곳에 모아 두었다. 선정비 또는 공덕비란 백성을 어질게 다스린 벼슬아치를 표창하고 기리기 위해
세우는 비석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선정과 관련 없이 부임한 관리들이 다른 지역으로 이임할 때
관례처럼 건립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척화비(斥和碑)

조선 고종 때 흥선 대원군(興宣大阮君)이 양인(洋人)을 배척하기 위하여 서울과 지방의 각지에 세운 비.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戒吾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
계오만년자손 병인작 신미립
이 비문의 뜻은 다음과 같다.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을 때 싸우지 않음은 곧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므로, 우리 자손만대에 경계한다.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움


 

 

 

 

 

 

 

 

 

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제33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교상리 28-1

빛벌가야(지금의 창녕)를 신라 영토로 편입한 진흥왕이 이곳을 순수(두루 돌아다니며 순시함)하며 민심을 살핀 후 그 기념으로 세운 비이다. 당시 빛벌가야는 신라가 서쪽으로 진출하는데 있어 마치 부채살의 꼭지와 같은 중요한 길목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 신라에 병합되어

하주로 바뀌었고, 565년에는 대야주(지금의 합천)와 합쳐져 비사벌군 또는 비자화군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비는 목마산성 기슭에 있던 것을 1924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비각안에 모셔 둔 것으로, 자연석의 앞면을 평평하게 다듬어 비문을 새기고, 그 둘레에 선으로 윤곽을 돌려놓은 모습이다.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이라는 제목이 보이지 않아 척경비(영토 편입을 기념하여 세운 비)라 일컫고 있으나, 임금을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수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술정리 동 삼층석탑

국보 제34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 120

탑이 세워져 있는 창녕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신라의 영역에 속해 있던 곳이며,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정치·군사상의 요지가 되었다. 탑은 2단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로, 통일신라 석탑의 일반적인 모습이다.

 

8세기 중엽인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탑으로,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인해 충분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세부적인 수법도 정교하여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만한 기품이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신라 영역에 속해있던 창녕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볼 때, 경주 중심의 탑 건립 경향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송현동 마애여래좌상

보물 제75호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105-4

큰 바위에 앞면을 돌출되게 조각한 마애불로 바위 자체를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로 이용하고 있다.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있으며, 둥근 얼굴에는 살이 통통하게 올라 온화한 인상을 풍긴다.

어깨는 넓게 떡 벌어져 있고, 팔과 가슴은 넓고 풍만하지만 크기에 비해 어딘지 힘이 빠진 듯한 느낌이다.

왼쪽 어깨를 감싸고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면서 입은 옷은 얇게 신체에 밀착되었는데, 형식적으로 처리된 계단식의 옷주름 때문에

사실성이 떨어진다. 손모양은 오른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손끝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으로 악귀를 물리친다는 의미를 지닌다.

 

대체로 이 석불은 얼굴이나 얇게 밀착된 옷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열의 양식을 이어받은 작품으로 보이지만, 석굴암 불상보다는

사실성이 줄어들고 힘이 빠져 통일신라 후기 불상의 양식을 보여준다.

 

                                                                                                                                              촬영일: 2012년 2월 7일

 

 

 

 

국보 제264호

영일 냉수리 신라비(迎日冷水里新羅碑)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신광면 토성리 342-1

 

1991년 3월 15일 국보 제264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67cm, 너비 72cm, 두께 25∼30cm이며 1989년 4월에 발견되었다.

화강암을 일부 가공하여 앞면 ·뒷면 ·윗면에 글씨를 새긴 특수한 형태의 고비()로, 앞면 12줄 152자, 뒷면 7줄 59자,

윗면 5줄 20자 등 모두 231자가 거의 또렷이 남아 있다.

이 비석은 앞면에 '지도로 갈문왕 ()'이라는 지증왕()의 즉위 전 호칭을 썼고, 계미()라는

간지()로 미루어 443년(눌지왕27) 또는 503년(지증왕 4)에 건립된 것이 분명하여 이제까지 신라 최고()의 비로

알려졌던 경상북도 울진군 죽변면() 봉평리() 고비(524년 건립)보다 81년 또는 21년 앞선 것으로 밝혀졌다.

이 비문에는 중국 문서에서 발견되는 신라의 옛 국명인 사라()가 최초로 나오고, 또 최초로 임금(지증왕)의 본명이

'지도로'라는 이름으로 나타났으며, 훼부(), 사훼부() 등 신라의 옛 지명과 아간지() ·나마() 등의

관등명이 나타나 신라 상대()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내용은 왕교()를 받아 중신회의()가 지도로 갈문왕에 의해 주재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 중신회의를 신라 최고회의였던 화백으로 보고, 갈문왕이 화백의 의장을 맡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추론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비문은 이두가 너무 많아 정확한 판독에는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촬영일: 2012년 1월 2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