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은 정몽주 선생 생가터 안내표지판 설치
포은 정몽주 생가터를 알리는 표지판이 설치됐다.
13일 오후 3시 포은 정몽주 선생을 연구하는 포은연구회는 한일도 오천읍장, 이정호 포항시의원
장상만 오천옹협장을 비롯한 회원 30여 명과 지역의 단체장들이 함께 모여 문충1리 마을회관 앞
삼거리에 표지판을 세웠다.
포항시의 지원을 받아 그동안 국도 및 지방도에는 이정표가 설치돼 있었으나 생가터 주변에는
아무런 표지판이 없어 방문객들에게 불편을 준다는 지적에 따라 이번에 포항시의 지원을 받아 설치됐다.
이번에 설치된 표지판은 유명한 목공예조각가가 직접 조각한 표지판으로서 찾는 이들로 하여금
한번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할 것이다.
☞ 위의 사진과 글의 내용은 경북동해뉴스 K news (http://knews.cc/web/bbs/board.php?bo_table=11&wr_id=6732)
2009년 2월 14일 11:19분에 등록된 기사의 내용임을 밝혀둔다.
2011년 3월 20일 일요일
아침부터 내리는 빗 속을 헤집고 낮선 동네로 안개 자욱한 계곡 입구를 돌아 다니면서
돌아 오던길 길 옆의 정몽주 생가터를 알리는 이정표를 보면서 찾아 가 보았다.
언젠가 지방 뉴스시간에 보도되는 내용을 본 적도 있었던 터라
한번쯤 가 봐야지 하던차 동네 입구로 들어 섰는데
문충1리 마을회관 앞 삼거리 안내판은 설치 되어 있었다.
화살표 방향 500M 하지만 동네 두바퀴를 돌아도 어디가 포은선생의 생가 터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시골 마을 어디를 가도 노인들이 대부분이지만 황사비 소식에 바깥 출입하는 사람도 없었고
어디 누구를 붙잡고 물어 볼 곳도 없었다.
우산 쓰고 할일없는 사람처럼 이곳 저곳 기웃 거려도 보고 결국 이정표 있는곳으로 다시와서
자세히 들여다 보니 파란색으로 약도가 그려져 있었다.
하지만 안내판의 약도 만으로는 처음 찾는이들에겐 있으나 마나 한 듯 했다.
이 골목을 두번째 돌아봐도 더 이상의 안내표지판이나 방향표시는 없었다. 이 집도 아니고......
이집도 아닌것 같고 이집 옆의 빈터도 아닌것 같았고......
이집의 문패에는 김씨성의 이름표가 걸려 있었다.
더 이상 찾아 볼곳도 가 볼곳도 물어 볼것도 없이 콘크리이트 포장이 끝나는 저 길로 들어가 보았더니
저 건너편 뒤를 보이고 있는 간판이 안내판인듯 그 곳으로 가 보았더니......
바로 여기가 그 곳 포은 정몽주 선생의 생가터 였단 말인가?
촬영일 : 2011년 3월 20일
출생
정몽주는 1337년 경상북도 영일에서 출생하였는데, 얼마 후 영천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
그의 증조부는 검교군기감을 지냈고, 조부는 직장동정, 아버지는 성균관 재생에 불과하였다.
그의 선조 3대는 검교직과 동정직을 가졌을 뿐 현직은 가지지 못한 지방의 사족이었다.
정몽주의 이름은 그의 그의 부친인 정거민(鄭居敏)이 꿈에서 중국의 주공을 만나고 낳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생애초기
정몽주는 1357년(공민왕6) 감시(監試)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이후
예문 검열·수찬(修撰) 등을 거쳐 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냈으며, 1363년 낭장 겸 합문지후·위위시승(衛尉寺丞)을 지내고
그해 동북면 도지휘사 한방신(韓邦信)의 종사관으로 여진족의 토벌에 참가하고 64년 전보도감판관(典寶都監判官)이 되었다.
이후 전농시승·예조 정랑 겸 성균박사·성균사예,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
응교 겸 성균직강(太常少卿寶文閣應敎兼成均直講)성균사성에 올랐다.
1372년에 정사(正使) 호사범(洪師範)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관직활동
1376년(우왕 2) 우사의대부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 으로서 이인임(李仁任)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排明親元)의 외교 방침을 반대하여
“점점 강해지는 명나라를 버리고 쇠퇴해가는 원나라와 친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라고 상소하였다가
울산 언양(彦陽)으로 유배 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사신으로 일본 규슈에 가서 규슈탄다이(지방장관)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을 만나 왜구의 단속을 요청하여 응낙을 얻고,
왜구에게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우산기상시·보문각 제학·지제교를 거쳐 1379년 전공판서(典工判書)·진현관제학(進賢館提學)·예의 판서(禮儀判書)·
예문관 제학 ·전법판서(戰法判書)·판도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듬해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문관으로 이성계 휘하에서 왜구 토벌에 참가하였다.
이어 밀직제학·상의회의도감사(商議會議都監事)·보문각 제학·상호군(上護軍)이 되었다.
1381년 성근익찬공신(誠勤翊贊功臣)에 봉해지고 이듬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다 입국 거부로 요동에서 돌아왔고,
1383년 동북면 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쳐들어온 왜구를 토벌하고, 다음해 정당문학에 올라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가서 세공(歲貢)의 삭감과 5년간 미납한 세공을 면제받고 긴장 상태에 있던 대명(對明) 국교를 회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가 되고 이듬해 다시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지고,
1388년 문하찬성사·지서연사(知書筵事) 이듬해 예문관 대제학·문학 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영립(迎立)했다.
죽음
1389년에는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한 뒤 공양왕을 괴뢰로 옹립하고 조정을 장악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커지어서 조준, 남은, 정도전 등이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숙청할 기회를 노리던 중,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황주(黃州)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이성계를 그날 밤 개성으로 돌아오게 함으로써 실패하였다.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정몽주를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일 것을 지시했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자택으로 부르자 정몽주는 정세를 엿보러 이성계를 병문안하러 왔다.
그때 정몽주와 이방원이 주고 받은 시조가 바로 《단심가》와 《하여가》이다.
이방원은 하여가를 통해 정몽주를 이성계의 세력으로 끌어들이고자 하였으나, 정몽주는 단심가로 이를 거절하였다.
출처: 다음백과사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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