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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봄 석당공원 길

도랑도랑 2016. 4. 3. 11:29



경주시외버스 터미널앞을 지나 우회전 하면 교량하나가 나오고 이 다리 끝부분에서 우회전 하면 김유신 장군 묘역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비교적 완만한 경사지를 오르면 매표소가 있는 주차장이 펼쳐져 있다. 주차장 앞을 돌아 내려오는 경사길에는 양쪽으로 키가 큰 벚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어느해 봄 햇살 좋은 오전 시간에 벚꽃이 하얗게 만발한 풍경에 반해 버렸는지 해 마다 이맘때쯤 한 번쯤은 다시 가보고 싶은 나만의 벚꽃길 명소인것만도 같다.

추차장에서 쭈욱 내려와 큰 도로가 보일즈음 좌측에 조그마한 공원이 하나 있는데 바로 이곳이 석당공원이었고 전에는 무심히도 지나쳐 온 길이기만 했다. 날씨는 흐렸지만 다리건너 흥무로를 지나 오면서 터널같은 그 좋은 벚꽃 풍경도 도로위에 한 줄로 길게 세워진 자동차들 때문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기분과는 다르게 석당공원으로 이어지는 이길은 일방통행로 이다 보니 석당공원 작은 주차장이나 김유신장군 묘역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보면 참 분위기 좋은 풍경을 감상할 수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 풍경에 매료되어 가끔은 지나가던 자동차가 길옆에 차를 세우면 나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진다.


















김유신 장군 묘역 주차장에서 내려오는 길




저기 커프 지점을 돌아서 내려가면 좌측에 석당공원이란 비석이 보이고 바로 앞에는 몇 대의 승용차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도 있다.

이 길은 일방통행로 이기도 하다.




석당(石堂) 최남주(崔南柱∙ 1905~1980)


석당은 을사보호조약이란 이름의 ‘을사늑약(억지조약)’이 체결돼 대한제국이 마지막 숨을 거두어가던 1905년에 민족의 불행과 함께 경주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신라사 지킴이’를 자임하며 경주박물관 직원이 되었다. 일본 고고학자들은 발굴작업때 한국인을 배제

했지만 石堂만은 예외였다. 1926년 서봉총 발굴때는 당시 스웨덴의 탁월한 고고학자이고 황태자인 구스타프도 참여했는데, 석당은

그에게 ‘무덤속에서 처음 금관을 들어내는 영광’을 줌으로써 한국과 스웨덴간 민간외교의 물꼬를 틔웠고, 이로 인해 스웨덴 왕실은

석당을 초청해 동양인 최초로 최고훈장을 주었다.


1957년 봄 석당은 연세대 민모 교수와 아들 정채군을 데리고 안강읍 흥덕왕릉을 답사했는데, 정채군이 예서체로 ‘興德’ 이라 새겨진 비석조각을 발견했다. 이로써 이 왕릉이 흥덕왕릉임이 확인됐다. 그러나 그 비석조각은 지금 종적이 없다. 민교수가 이를 연세대 도서관에 기증 보관했는데, 그후 사라져버렸다. 석당은 이 일을 내내 아쉬워했지만, 민교수는 아무말 없이 얼마전 타계했다.

1934년 10월 헌강왕릉 능지기가 와서 “우리집 앞 돌다리에 글자가 새겨진 돌덩어리가 보입니다” 해서 解讀해보니 놀랍게도 591년 진평왕 13년에 남산신성 쌓을때의 築城碑(축성비)였다. 20자 9행으로 된 이두문자 비문에는 “법대로 축조한 성벽이 3년안에 무너지면 벌을 받겠다”는 서약문과 공사 책임자의 관등, 성명, 주소 등이 적혀 있었다. 신라인들은 자신의‘책임'을 돌에 새겨 남겼던 것.


석당은 또 남산 계곡에서 불상머리 하나를 발견했는데, 이 신라 佛頭는 지금까지 발굴된 최대 크기이고 조각솜씨도 뛰어나 신라석공의 재능과 불심을 짐작케한다. 그는 경주 남산 불교유적 학술조사에 조선인으로는 유일하게 참가했고, 숭복사 터를 찾아냈으며, 외동면 원원사지 석탑을 복원했고, 사재를 틀어 문무왕릉 비각을 건립했다.

어떤 고고학자보다 빛나는 업적을 남긴 석당은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김유신장군 묘소 입구 ‘석당 추송비’앞에서 최근 그를

기리는 추념식이 열렸다. 한평생을 청빈으로 살며, 민족문화 사랑의 외길을 걸었던 석당의 정신이 새롭다.





古無新朴鍾禹詩碑(고무신박종우시비)


1970년 고려대학 경영대학원을 수료하였다. 1957년 『사상계(思想界)』에 시 「나」로 신인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에 「소」, 「창(窓)」, 「벽」, 「양(羊)」, 「양지(陽地)」 등이 있고, 시집에 『조국(祖國)의 노래』(50), 『습지(濕地)』(61), 『양지(陽地)』(67), 『한알의 씨앗을 위하여』(71) 등이 있다. 동아대학(東亞大學) 강사와 『자유공론(自由公論)』 편집국장을 역임하였다. 〈100인문학회(百人文學會)〉동인이다.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고무신 선생은 일본으로 유학을 간다. 그러나 1937년에 일본이 일으킨 중일전쟁(만주사변)으로 징병을 당해

만주로 가게 된다. 학업을 중단하고 전쟁터에 끌려간다. 이런 체험때문인지 읽어본 몇 편의 시는 매우 우울하다. 「기도」라는 시는 당시 선생이 징병 당하고 겪게 된 집안사정이 잘 나온다. 시에서도 보이듯 식민지민으로 ‘용병’이 되어 가기 싫은 전쟁터를 가는 처참함은 설명할 길이 없다. 그의 시는 온전하게 받아낼 수도 거부할 수도 없었던 어린시절의 그 상처를 잘 보여준다.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되고 만주에서 귀국 했으나 꿈 많던 청춘은 인생의 주소를 잃어버렸다. 그 방황과 좌절의 실마리를 헤아릴 수 있는 시가 있다. 삶을 두고 쓴 「인생론」이란 시를 보면 부도덕한 권력에 밀려 개인의 인생이 막연해져버린 것이 잘 드러난다. 사람들이

다들 보고 간 연극을 맨 뒷자리에 끼어 앉아 본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요약해 제시한 명사들, “사랑, 밀어, 고뇌, 희열, 슬픔, 미움”이

모든 것이 시인에게는 “끈이 떨어진 연(鳶)”이 되고 말았다. 팔목에 묶다가 놓쳐버린 풍선은 어느 하늘을 떠다니는지 알 수도 없다. 누구의 인생이든 심각한 한편의 드라마로 진행되는 것이야 동일하지만 고무신 선생의 인생은 끈을 놓은 연과 풍선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고무신 선생은 장수하지 못했다. 청년시절 정신과 육체가 황폐해진 영향이었을지, 시 쓰는 일로 마음이 몹시 힘들어서 그런지 쉰 넷으로 작고했다.


유치환 시인이 경주에 있을 당시 김동리 선생을 모시고 청맥동인을 이끌었고, 문학행사와 활동을 하던 주 무대가 경주였기 때문에 추모비는 김유신장군 묘역 아래 세워 졌다고 한다.


기다리는 아침

아직 새벽은 멀었다

峨峨한 山脈

마을과 고을

봄이 올 때까지

아직은 아직은

건드리지 말라

도사린 설움

설움을 터뜨리지 말라






                                                                                                                                                                      촬영일: 2016년 04월 02일 (토요일) 경주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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