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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 (慶山 八公山 冠峰 石造如來坐像)

도랑도랑 2015. 7. 20. 21:28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 (慶山 八公山 冠峰 石造如來坐像) / 보물  제431호

 

경상북도 경산시 팔공산 남쪽 관봉(冠峰)의 정상에 병풍처럼 둘러 쳐진 암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좌불상이다. 관봉을 ‘갓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

불상의 머리에 마치 갓을 쓴 듯한 넓적한 돌이 올려져 있어서 유래한 것이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뚜렷하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탄력이 있지만,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가 있다.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오고 굵고

짧은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표시되어 있다. 다소 올라간 어깨는 넓고 반듯해서 당당하고 건장하지만 가슴은 평판적이고 신체의 형태는 둔중해진 듯

하다. 투박하지만 정교한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는데, 오른손 끝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유사한 손모양은 석굴암의 본존불과 닮았다. 그러나

불상의 왼손바닥 안에 조그만 약합을 들고 있는 것이 확실해서 약사여래불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4각형인데 앞면과 옆면으로 옷자락이 내려와 대좌를 덮고 있다. 불상의 뒷면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벽이 광배의 구실을 하고

있으나, 뒷면의 바위하고는 떨어져 따로 존재하고 있다.


풍만하지만 경직된 얼굴, 형식화된 옷주름, 평판적인 신체는 탄력성이 배제되어 8세기의 불상과는 구별되는 9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공식 명칭이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 (慶山 八公山 冠峰 石造如來坐像) / 보물  제431호 이라는것을 문화재청 자료를 찾아보면서 알게된다.

지금까지 주변에서 흔하게 팔공산 갓바위라고 부르는 이름만 들어온셈이다. 이 사진을 정리하면서 수 년전 처음 이곳을 호기심 반으로 찾아본 이후 지난 사진을

들춰보니 벌써 8년하고도 반년이 지나버린 시간이 흘러가버린 셈이다. 정확하게는 2006년 12월 24일 아들 딸 온가족이 처음 이곳을 찾아가 보았던것이다.

 

 

 

관봉 석조여래좌상 흔히 갓바위부처님이라 사람들은 부르고 있지만 이곳에 오르기 전 거쳐 지나는 사찰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채 어제 선본사라는 현판을

자세히 쳐다보기도 했다. 다음은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 선본사 갓바위 홈페이지에 실린 선본사 소개 내용중 위치와 환경에 관한 내용의 글을 옮겨본다.

 

선본사(禪本寺)는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대한리 팔공산(八公山)의 관봉(冠峯) 아래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직영사찰이다.이곳은 절 이름보다는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 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래서 절의 동쪽에 있는 갓바위 부처님에는 가파른 산세에도 불구하고 늘 참배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잔병치레가 유달리 많은 손주아이 손을 붙잡고 주름진 이마에 맺힌 땀방울도 아랑곳 하지 않으며 할머니는 이 곳 갓바위 약사불께 치성을 드리러 오른다. 먼 길

떠난 자식의 무사를 비는 어머니들, 세속에 찌들어 잠시라도 지친 심신을 달래고 마음의 평온을 되찾으려는 선남 선녀들, 모두가 웅대한 갓바위 부처님의 위용에

마음을 의탁하고 살그머니 머금은 미소에 저절로 기쁨을 안고 돌아간다. 정성껏 기원하면 꼭 한가지 소원은 이루어 주신다니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선본사는 바로 이 갓바위 부처님에서 내려다 보이는 팔공산의 아늑한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 나라 곳곳의 산천이 예로부터 불교 성지 아닌 곳이 드물지만

특히 팔공산은 한국 불교 역사의 초창기에 있어서 매우 커다란 위치를 차지한다.

팔공산은 대구광역시와 경북 군위군.경산군.영천군.칠곡군에 걸친 높이 1,193m 의 명산이다. 빼어난 산세와 풍광으로 일찍부터 경북의 영산(靈山)으로 알려져

왔고, 지금은 도립공원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또한 이 산은 신라 시대부터 공산(公山), 또는 부악(父岳)이라 불리며 5악(岳)중의 하나인 중악(中岳)

으로 경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신라 불교가 국가적으로 공인된 것은 527년(법흥왕 14)의 일이지만 이보다 앞서 불교는 이미 민간에 유포되어 있었다.

즉 일선군(一善郡)에 사는 모례(毛禮, 또는 毛綠)라는 사람이 공인 이전부터 불교를 신앙하고 있었고, 고구려에서 온 묵호자(墨胡子)와 아도(阿道)화상도 이곳에

머물며 포교 활동을 펼쳤다고 한다.


이 신라 불교의 초전(初傳)이 이루어졌던 일선군이 바로 오늘날 팔공산 아래에 있는 경북 선산군이다. 아도가 머물렀던 모례의 집은 후일에 도리사(桃李寺)가 되어

지금도 신라불교의 초기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 불교사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팔공산에는 이후 많은 승려가 주석(住錫)하고 사찰이 자리

잡으면서 명실공히 신라불교의 생생한 역사가 전개되었다. 동화사(桐華寺).은해사(銀海寺).송림사(松林寺) 등의 사찰과 제2석굴암이라 불리는 군위삼존석굴(軍威

三尊石窟), 그리고 관봉의 갓바위 부처님 등이 이를 잘 말해 준다.

 

 

 

 

 

 

팔공산의 남쪽 봉우리 관봉(冠峰) 정상에 자리하고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불 좌상으로서, 전체 높이는 4m에 이른다. 관봉이 곧 우리말로 '갓바위'이므로 흔히

 '갓바위부처님'이라고 부른다. 또 머리에 마치 갓같은 판석(板石)이 올려져 있기에 그렇게도 부른다. 관봉은 인봉(印峰).노적봉(露積峰)과 함께 팔공산의 대표적

봉우리로서 해발 850m의 고봉(高峰)이다. 그래서 이 곳에서는 팔공산의 서남쪽이 모두 두루 조망(眺望)된다.


이 부처님은 화강암 한 돌로 만든 것인데, 몸뿐만 아니라 대좌도 역시 한 돌로 되어 있다. 불상의 광배(光背)는 없지만 뒤쪽에 마치 병풍을 친 듯 기다랗게 바위가

둘러져 있어 혹시 이 자연 바위를 광배로 삼았기 때문에 따로 광배를 만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는 소발에 육계가 큼직하고 그 위로 두께 15cm정도의 흡사 갓모양을 한 얇은 바위가 얹혀졌다. 바위 아랫면에는 육계에 맞닿는 곳에 둥근 구멍을 파서 육계에

맞도록 하였으며, 웃면 가운데는 같은 식의 둥근 구명을 도드라지게 하고 그주위에 화판(花瓣)을 조각했다. 그래서 어느정도는 인공적 조각임을 느끼게 한다.

얼굴은 양쪽 볼이 두툼하게 되어 있는 등 비교적 둥글고 풍만한 편이다. 입술은 굳게 다물어 대체로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으며 이목구비가 조화스럽게 잘 표현

되어 있다. 이마 한 가운데는 백호(白毫)가 둥글게 솟았고, 오똑한 코 아래의 인중도 두드러지고 있다. 두 귀는 길게 양쪽 어깨에까지 늘어졌으며 목에는 삼도(三道)

가 뚜렷하다.


두 어깨는 반듯하고 넓어 당당한 신체와 잘 어울리고 있다. 오른손은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고 있어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비슷한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이 수인은 석굴암(石窟庵) 본존불의 그것과 양식상 흐름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왼손은 결가부좌한 왼쪽 발 부근에서 손바닥을 위로

향해 약합(藥盒)을 올려놓았다.


불상에 표현된 불의(佛衣)는 통견(通肩)인데 두 팔을 거쳐 두 무릎을 덮고 대좌 아래로 흘러내려 있으며, 불의의 옷주름을 표현한 선각(線刻)이 매우 유려하다.

그리고 가슴 앞에는 속옷의 일종인 승가리(僧伽梨) 혹은 군의(裙衣)의 띠매듭이 보인다. 불상의 뒷면에는 옷의 표현이 없고 그냥 평면으로 되어 있다.


대좌는 신체에 비해 작은 편이다. 대좌 윗부분에는 길게 입은 옷의 끝자락이 엎고 있는데 이같은 대좌 형식을 상현좌(裳懸座)라고 한다. 이것은 팔공산 부근에

있는 군위(裙衣) 삼존불 가운데 본존불의 대좌형식과도 유사하다.


이 갓바위 부처님은 절에 전하는 바로는 원광법사(圓光法師)의 수제자인 의현대사(義玄大師)가 어머니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638년(선덕왕 7)에 조성한 것이라

한다. 그러나 전체적 양식으로 보아 8~9세기 작품으로 보이는 것이 학계의 일반적인 정설이다. 현재 보물 제 431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불상의 학술상 정식 명칭은 '관봉석조여래좌상'. 이름에서 굳이 약사불인 것을 밝히지 않은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간 이 부처님의 명칭에 대해 미륵불, 아미타불

등 이론(異論)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듯이 왼손에 보면 약합이 있는 것이 뚜렷하다. 또 옛날부터 이 부처님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약사여래로 생각

하고 있었다. 단순히 전하는 말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이 근거 없이 전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그리고 어쨌든 손위의 약합이 분명한 이상 앞으로는 약사여래로 부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현재 갓바위 부처님 앞에는 약 80평 가량 널찍하게 터가 닦였고, 바닥에 돌이 깔리고 주위에는 철제 난간이 둘러쳐져 있다. 또 그와 함께 선본사에서 올라오는 길이

좀 더 넓혀지고 계단과 철제 난간이 많이 보완되었다. 그래서 예전에 비해 한결 기도드리기 편하게 되었다.

 

 

 

 

 

 

 

 

 

 

 

 

 

 

 

 

 

 

 

 

                                                                                                                                                     촬영일: 2015년 07월 19일(일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