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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과 장기 일출암

도랑도랑 2017. 12. 19. 22:24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경북 경주시 양북면(陽北面) 봉길리(奉吉里)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水中陵).


사적 제158호. 대왕암(大王岩)이라고도 하며, 대왕암은 육지에서 불과 200여 미터 떨어진 가까운 바다에 있다. 큰 바위가 주변을 둘러싸고

있고, 중앙에 약간의 넓은 공간이 있는데, 이 공간에 대석을 이동하여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중앙의 대왕암 주변을 큰 바위(화강암)가 둘러

싸고 있는데,네 방향으로 물길이 나 있어 주변 바위는 네 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연적으로 물길이 나 있는 상태이나 약간의 인공을 가하여

튀어나온 부분을 떼어 내어 물길이난 가운데 공간을 약간 다듬은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닷물은 파도와 함께 동쪽 물길을 따라 중앙 공간으로 흘러들어와 서쪽 물길을 통해 빠져 나간다. 바닷물이 물길을 따라 중앙으로 진입할 때

파도가 소멸되기 때문에 중앙의 물은 파도의 영향을 받지 않아 잔잔하며, 물 높이는 중앙의 큰 바위를 살짝 덮을 정도를 항상 유지한다.

대석의 안치 방법과 유골의 수장 여부에 대하여 그 동안 많은 의문점이 있었다. 2001년 3월 한 방송사에서 역사연구 프로그램 제작을 위해

초음파 탐지기 등을 이용하여 바위의 조직과 바위의 내부 및 수면하를 조사한 결과, 대왕암 내부 또는 아래에 유골이나 부장품이 존재하지

않음을 확인하였다.


대왕암에서 멀지 않은 육지에 '낭산'이라고 하는 신성시되는 언덕이 있는데, 이곳에 '능지탑'이라고 불리는 탑이 있다. 연구 결과 문무왕의

시신은 이 능지탑에서 화장되어 대왕암 주변에 산골하고, 대왕암 주변 바위에서 절리된 큰 바위를 중앙의 빈 공터에 남북으로 안치시켜

장례를 지낸 형식적 절차를 가짐으로써 무덤(왕릉)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대왕암의 네 방향으로 수로를 낸 것은 석가의

사리를 안치한 탑의 형식을 적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라의 한 설화에, 문무왕이 그 아들 신문왕(神文王)에게 만파식적(万波息笛)이라는 피리를 주어, 문무왕이 죽은 후 바다의 용이 되었다가,

만파식적을 불면 용이 나타나 국가의 안위를 지키도록 하겠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한다. 아들 신문왕은 바다에서 1.5km 떨어진 동해변에

부왕을 기리는 감은사(感恩寺)를 지어, 절의 금당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오도록 설계하였다. 이는 용이 쉽게 접근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감은사의 동쪽에는 약간 높은 언덕이 있다. 이곳은 대왕암을 정면으로 바라다 볼 수 있는 곳인데, 이곳에 이견대(利見臺)를 짓고 신문왕은

이곳에 수시로 와서 대왕암을 망배(望拜)하였다고 한다.




















장기일출암(長鬐日出菴)

 

경치가 아름다운 '장기 일출암'은 장기천을 따라 내려오는 민물과 동해의 바닷물이 만나는 곳에 있는 바위로 옛날부터 생수가 솟아난다고

해서 일명 '날물치' 또는 생수암(生水岩)이라고도 불리어 왔다. 물에서 조금 떨어져 우뚝 솟은 바위 틈새로 그림 처럼 붙어 자란 소나무들과

그 사이로 떠오르는 아침 해의 조화가 실로 절경이어서 육당 최남선이 '장기일출'을 조선 십경(朝鮮十景) 중의 하나로 꼽았을 만큼 빼어난

장관을 연출한다. 또한 장기면의 옛 지명도 해돋이와 관련이 있는 지답현(只畓縣, 只畓: 해뜰 때 물이 끓어 오르는 모양) 이라고 불렀다.

날물치 해송과 해돋는 바다가 어우러진 모양새가 너무나 아름다워 '장기 일출암'으로 명명하고 있다.

 

육당 최남선의       압록 기적(汽笛) : 경적 울리는 압록강의 기선      경포 월화(月華) : 경포대 수면에 비치는 달
     조선 10경       천지 신광(神光) : 백두산 천지 풍광                    연평 어화(漁火) : 연평도 조기잡이 어선 불빛
                          대동 춘흥(春興) : 대동강변 봄빛                       장기 일출(日出) : 장기에서 뜨는 아침 해
                          금강 추색(秋色) : 금강산의 단풍 비경                변산 낙조(落照) : 변산 앞바다의 해넘이 
                         재령 관가(觀稼) : 황해도 구월산 동선령 풍경       제주 망해(茫海) : 제주도의 망망 대해

 

                                                                                               장기일출암(長鬐日出菴) 설명문 내용 중에서~




포항시 남구 장기면 신창리 장기 일출암(浦項市 南區 長鬐面 新倉里 長鬐 日出岩)














할매바위


929번 지방도 장기면사무소 앞을지나 장기천을따라 내려가다 보면 좌측 산아래 우뚝선 바위하나가 눈길을 끈다. 할매바위와 할배바위

라는데 표지판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장기면 금곡리 입구에 바위로 된 이 산을 사람들은 머리를 바다쪽에 두고 동서로 길게 누운 모습이 마치 용트림하는 모습과 흡사하다고

해서 용암이라 한다. 이 용암의 남쪽에 다소곳이 앉은 할매바위가 있고, 조금 떨어진 윗쪽에 몹시 화를 낸듯한 할배 바위가 있는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다.

 

할매와 할배 부부는 아들 칠형제를 두고 있었는데 어느 날 용왕의 아들이 몰래 뭍으로 나와 나쁜 짓을 하다가 용왕의 미움을 받아 그만

이곳에서 돌로 변해서 용왕이 되었다. 어느 날 용왕이 된 용은 이웃 할매부부의 막내 아들을 자신 대신 용왕에게 보내어 잘못을 용서하여

줄 것을 간청하려고 고집 센 할배 몰래 할매에게 부탁하여 막내아들은 구름다리를 건너 용궁으로 갔으나 약속된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할배는 할매에게 아들을 찾아오지 않는다고 성화가 대단했다. 돌아오지 않는 아들 때문에 애를 태우던 할매는

그만 돌이되어 버렸다. 이런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할배도 머리끝까지 치받는 화를 참지 못하고 역시 돌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까지도

할배 할매 바위는 서로 외면한 채 막내 아들을 기다리며 하천을 향해 서 있다. 







신년 행사관계로 신창리에서 경주시 양남면에 위치한 이곳 펜션까지 숙소를 물색하러 갔다가 담아본 사진이다.











장기척화비(長鬐斥和碑)


1866년(고종 3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를 치른 뒤 흥선대원군이 쇄국의 결의를 굳히고 온 국민에게 외세의 침입을 경계하기 위해

1871년 4월을 기해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의 요소에 세운 척화비 중 하나이다.사암(砂巖)으로 된 척화비는 장방형 판석(長方形 板石)으로

6면을 마연(磨硏)한 다음 앞면에 각자(刻字)하였다.


이 대원군척화비(大院君斥和碑)의 원래 위치는 장기읍성 내에 있었던 것을 1951년 4월초에 장기(당시 지행면)지서 입구에서 찾아 현재

장기면사무소 정문좌측 도로변에 세워두었다가 1990.12.1 장기면사무소 정원에 이설(移設)하여 보호책을 설치하였다.

 
척화비의 비문에는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丙寅作 辛未立"(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계오만년자손병인작 신미립)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며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우다」라고 적혀 있다.이 비는 1866년 병인양요(丙寅洋擾)와 1871년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룬 후 전국의

요충지에 세웠는데 임오군란 때 모두 철수되었다.척화비의 높이는 120cm, 폭 45cm, 두께 21cm로 경북도내에 구미, 청도 척확비와 함께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근민당(近民堂) : 조선시대의 관아 건물로 경상북도 포항시 남구 장기면 읍내리 장기면사무소 내에 있다.


조선시대 장기현의 관아 동헌 건물로, 영일 장기읍성(迎日長鬐邑城, 사적 제386호) 내에 있던 것을 1922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지행면

(현 장기면) 사무소로 사용해 오다가 1986년 복원하였다. 현재 장기면사무소 건물 오른편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지붕구조와 건물 규모는

원래대로 복원되었으나 내부구조는 약간 변형되었다.


정면 5칸·측면 2칸 규모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전면은 겹처마, 측면과 후면은 홑처마이다. 낮은 기단 위에 덤벙주초석을 놓고 그 위에

원주를 세웠으며 공포의 구성은 일익공식(一翼工式)으로 되어 있다. 건물 전면 상단에 ‘근민당(近民堂)’이라 쓰인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

현판은 복원할 때 만든것으로 보인다.


근민당 왼편으로는 1871년(고종 8)에 흥선대원군이 서양의 침략을 국민에게 경고하고, 서양인들을 배척하기 위해 전국에 일제히 세운

척화비인 장기 척화비(長鬐斥和碑,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224호)가 서 있다. 장기 척화비 역시 장기읍성에 있다가 1990년 현 위치로

이건되었다.




"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 戒吾萬年子孫丙寅作 辛未立"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계오만년자손병인작 신미립)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며 화해할 수 밖에 없고 화해를 주장하면 나라를 파는 것이 된다.




근민당(近民堂)















                                                                                                                                                                   촬영일: 2017년 12월 19일(화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