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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함께해 본 경주 투어

도랑도랑 2015. 12. 27. 18:44

 

 

경주 춘양교지와 월정교지((慶州 春陽橋址와 月精橋址) / 사적 제457호

 

이 다리는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되었던 월정교를 복원한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경덕왕(景德王) 19년(760)에 '궁궐 남쪽 문천(蚊川)위에 월정교(月淨橋), 춘양교 두 다리를 놓았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시대에 이르러 월정교(月精橋)로 표기되어왔다. 월정교의 규모는 길이 60.57m로 발굴조사 결과 교각 사이에서 불에탄 재편과 기와편이 출토된

점으로 보아 교각 상면(上面)이 누각(樓閣)과 지붕으로 연결된 누교(樓橋)였을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교각은 센 물살에 견딜수 있도록 주형(舟形)으로 쌓았다. 다리의 규모는 물론이거니와 축조 방법과 석재의 색깔, 재질까지도 이곳에서 동쪽으로 약 700m 상류 쪽에 축조 되었던

춘양교와 거의 우사한 것으로 밝혀졌다. 월정교는 우리나라 고대 교량의 축조 방법과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아니라, 신라왕경의 규모와 당시의 교통로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난 주 토요일 고향 친구들 대구 모임에서 한 친구가 금요일의 성탄절에 이어지는 삼일간의 연휴기간 중 1박 2일의 일정으로 토요일인 26일 부부가 경주에 갈 예정인데 특별한 일 없으면 함께할 수 없겠느냐는 제안을 받고 그 친구 내외가 도착하는 시간에 맟추어 약속장소에서 만나게 되었다. 이상 기후의 현상인가  친구와 만나던 날 계절을 잊은듯 아욱꽃이 피어있었다.

 

 

 

傳 염불사지 삼층석탑 / 사적 제311호

 

신라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수많은 불교유적이 게곡마다 조영된 경주남산은 신라인들의 역사와 문화, 신앙이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는 영산으로써 2000. 12. 2.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동남산 봉구곡 자락 남산동 1130번지 일원에 위치한 염불사지에 대해 삼국유사에는 "한 스님이 하루에 몇 번씩 시간을 정해 염불을 외우셨다. 법당에 앉아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그 소리가 당시 서라벌 360방 17만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어 사람들은 그를 공경하여 念佛師라 렀는데 스님이 돌아가니 그의 초상을 흙으로 만들어 敏藏寺에 모시고 그가 살던 避里寺를 念佛寺로 고쳐 불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무너져 있던 傳 염불사지 석탑 2기의 탑재와 도지동 이거사지 삼층석탑의 1층 옥개석을 이용 하여 1963년 불국동 구정광장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2008.1.24 복원을 위하여 해체하였으며, 복원공사는 2007.6.13. 착공하여 2009.1.15.까지 석탑 2기와 주변정비를 완료 하였다. 석탑의 사리장엄구를 봉안 하였던 사리공은 다른 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2개이며, 3층 탑신의 방형사리공이 투공된 점 등으로 보아 최초 탑 건립시기를 7세기말 또는 8세기 초로 추정할 수 있다.

 

 

 

 

 

 

 

신라충신 박제상과 장사 벌지지(長沙 伐知旨)

경주시 배반동 망덕사지(望德寺址) 남쪽 남천(南川) 제방 위에 있다. 신라 눌지왕 때의 충신 박제상(朴堤上)이 고구려에서 왕의 아우 복호(卜好)를 구출한 뒤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또다른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구하기 위해 왜국으로 떠나자 이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부인이 남편의 뒤를 쫓다가 드러누워 울부짖던 곳이라고 한다. 그녀가 길게 드러누웠던 모래를 장사(長沙)라고 하며, 당시 친척들이 그녀를 데려가려고 부축하니 다리를 뻗치고 앉아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그 자리를 '벌지지(伐知旨)'라고 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1989년 10월 석굴암연구회에서 세운 비석이 놓여 있다.


 


 

 

경주 망덕사지 당간지주(慶州 望德寺址 幢竿支柱) / 보물제69호


당간은 옛날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달던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인데, 당간을 고정 시키기 위해양옆에 세운 돌 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망덕사터 서남쪽에 65Cm 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형태를 보면 안쪽면은 위로 평면을 이루고, 나머지 세 면은 아랫쪽에서 위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진다. 기둥의 맨 위는 바깥쪽이 둥글고경사지게 처리 되었다. 바깥쪽 양 모서리는 중간쯤에서 부터 위로 모를 죽였으나 장식은 없다. 보통은 상, 중, 하 세 곳, 또는 상, 하 두 곳에 당간을 고정 시키던 구멍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당간지주는 맨 위쪽 끝에만 네모나게 홈을 파서 당간을 고정 시키도록 되어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 망덕사는 신라 신문왕(紳文王)  5년(685)에 처음 건립 되었다. 이 당간지주도 절이 처음 건립될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통일신라시대 초기의 양식이나 조각수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망덕사지(望德寺址)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사찰인 망덕사의 절터.

 

사적 제7호. 면적 2만 4,300㎡. 〈삼국유사〉에 의하면 679년(문무왕 19) 당의 침입을 물리치기 위해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다는 소문이 당(唐) 왕실에 전해져 사신이 파견되자 사신을 속이기 위한 방편으로 사천왕사의 건너편에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84년(신문왕 4) 4월에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 뒤의 사찰 역사는 전하지 않지만 현재 절터에 목탑의 기단이 동서에 있고, 그 북쪽에 금당지(金堂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쌍탑가람식 배치였음을 알 수 있다. 절터의 남서쪽 솔밭에 있는 당간지주 (幢竿支柱)는 보물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보리사(菩提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의 말사이다. 886년(신라 헌강왕 12)에 창건했으며, 경주시 남산에 있는 여러 사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삼국사기》에 ‘헌강왕과 정강왕의 능이 보리사의 동남쪽에 위치한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왕릉의 위치를 정하는 기준이 될 정도로 유서 깊은 사찰이었으나 이후의 연혁이 전하지 않아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던 것을 1911년 보경사(寶鏡寺) 비구니 박덕념(朴德念)이 중창하고, 1932년 비구니 남법명(南法明)이 중수하였다. 1977년에는 비구니 추묘운(秋妙雲)이 불사를 시작하여, 1980년 대웅전과 선원·요사채 등을 세우고 비구니 사찰로 만들었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대웅전과 산신각·선원·종각·요사채 등이 있으며 유물로는 보리사석불좌상과 마애불이 유명하다.

 

그 중 보리사석불좌상은 경주 남산에 있는 불상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된다. 총 높이 4m, 불상 높이 2.35m, 광배 2.7m로 앞에는 당초문과 보상문·화불 등의 무늬를 새겼고, 뒷면에는 약사불을 좌상으로 조각하였다. 주존불의 수인이 항마촉지인이라 석가모니불로 볼 수도 있으나, 뒷면에 동쪽의 부처인 약사불을 배치한 것으로 보아 앞쪽은 서쪽의 부처인 아미타불로 보는 것이 옳다. 보물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절 남쪽 산허리로 난 오솔길을 따라 35m쯤 가면 바위에 새긴 마애석불이 있다. 1.5m의 좁은 감실 안에 90cm 크기로 새겨진 이 불상은 조각이 거칠고 아래 부분이 생략되어 공중에 떠 있는 듯하다. 신라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경주 남산 미륵곡석불좌상 (慶州南山彌勒谷石佛坐像) / 보물 제136호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36호로 지정되었다. 전체 높이 4m, 불상 높이 2.35m, 광배(光背) 2.7m이다. 경주 남산 미륵골에 있는 보리사(菩提寺)에 있는 석불좌상이다. 광배와 대좌(臺座)를 모두 갖추었고, 본질적으로 석굴암 본존불(本尊佛)과 비슷하나 보다 많이 형식화되어 있다. 앞면에는 당초문과 보상문을, 뒷면에는 약사불을 좌상으로 조각한 보리사 마애석불(경북유형문화재 제193호)이 있다.

 

얼굴은 둥글지만 풍만하지 않으며, 가는 눈과 날카로운 코, 뚜렷한 입에 침잠(沈潛)한 웃음이 8세기 신라인의 정신적 고고함과 비범한 조각솜씨를 보여준다. 귀는 길며 목에는 명확한 삼도(三道)가 있다. 어깨는 약간 움츠렸으며 가슴은 풍만한 편이나 평판적(平板的)인데, 이는 신체의 비율과 함께 8세기 불상의 이상형에서 9세기 양식으로의 이행을 보여준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손과 팔은 연약하게 표현되었고, 하체는 딱딱하게 처리되었으며, 통견(通肩)의 법의(法衣)는 힘없이 늘어져 있는 점 등이 간결한 수법은 이미 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 (慶州 南山 塔谷 磨崖佛像群)

 

이 일대는 통일신라시대에 신인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남쪽의 큰 바위에는 목조건물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석탑조각들이 흩어져 있는 것으로 보아 남쪽면의 불상을 주존으로 하여 남향사찰을 경영했었음을 알 수 있다. 9m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여러 불상을 회화적으로 묘사하였다.

 

남쪽 바위면에는 삼존과 독립된 보살상이 배치되어 있고, 동쪽 바위면에도 불상과 보살, 승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을 표현해 놓았다. 불상·보살상 등은 모두 연꽃무늬를 조각한 대좌(臺座)와,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 한 광배(光背)를 갖추었으며 자세와 표정이 각기 다르다. 비천상은 하늘을 날고 승려는 불상과 보살에게 공양하는 자세이지만 모두 마멸이 심해 자세한 조각수법은 알 수 없다. 서쪽 바위면에는 석가가 그 아래에 앉아서 도를 깨쳤다는 나무인 보리수 2그루와 여래상이 있다.

 

하나의 바위면에 불상·비천·보살·승려·탑 등 다양한 모습들을 정성을 다하여 조각하였음은 장인의 머리속에 불교의 세계를 그리려는 뜻이 역력했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조각양식은 많이 도식화되었으나 화려한 조각을 회화적으로 배치하여 보여주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특이한 것이다.

 

 

 

 

 

 

경주 남산 불곡석불좌상(慶州南山佛谷石佛坐像)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98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1.42m이다. 경주 남산 동쪽 기슭 암석에 깊이 0.6m의 감실(龕室)을 파고 거기에 불상을 높이 새긴 마애불(磨崖佛)로,

중국에서 유행하던 마애석불(磨崖石佛) 같은 것이다. 이 불상이 조성된 이후 계곡을 부처 골짜기[佛谷] 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단정한 자세에 얼굴은 둥글고 아미를 약간 숙였으며, 알맞은 양감(量感)에 도드라진 눈, 깊이 팬 입가 등에 미소가 번지고 있다. 머리는 두건을 귀까지 덮어쓴 것 같아 후대의 나한상(羅漢像)의 불상과 유사하지만, 얕은 육계(肉髻), 부드러운 굴곡 등은 큰차이가 있다. 반듯한 양 어깨에 걸친 상의는 길게 흘러내려 대좌를 덮고 있으며, 광배(光背)는 없다. 보살적인 인상이 짙으며 부은 듯한 눈, 삼도(三道) 없는 목은 고식(古式) 불상의 특징과 유사하다. 전체적으로 번지는 인상은 자세가 아름답고 여성적인 모습을 취하고 있다. 경주 남산에 있는 신라 석불 중 가장 오래된 석불로, 조성연대는 삼국시대로 짐직된다고 한다.

 

 

 

 

 

 

경주 교촌마을

 

중요민속자료 제27호인 경주최씨고택과 중요무형문화재 제86-다호인 경주교동법주가 자리잡고 있는 교촌마을은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進士)를 배출한 경주 최부자의 얼이 서린 곳이다. 특히 최부자집에서 가훈처럼 내려온 원칙인 “벼슬은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 모으지 말라,

과객(過客)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에는 남의 논밭을 매입하지 말라, 최씨 가문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이 곳에는 원효대사와의 사이에 설총을 낳은 신라 요석공주가 살던 요석궁이 자리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며, 부근에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가 서려 있는 계림과 내물왕릉, 경주향교, 김유신 장군이 살았던 재매정이 있다.

 

 

 

 

경주개 동경이 / 천연기념물  제540호

 

경주지역에서 사육된 것으로 알려진 동경이는 <동경잡기(東京雜記)>,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 옛 문헌에 자주 등장하였고, 신라고분에서 토우로 발굴되는 등 그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

 

현재 경주에서 사육 중인 경주개 동경이는 단미(短尾)·무미(無尾)를 특징으로 하는 문헌 기록과 외형적으로 일치하고, 유전자 분석결과 한국 토종개에 속하는 고유 견종으로 밝혀졌다. 아울러 경주개 동경이는 개체 이력관리, 질병관리, 번식관리, 혈통관리를 위한 시스템 구축과 운영 등 체계적인 보호·관리를 통해 300여 두가 사육되고 있다.

 

 

 

 

 

경주교동최씨고택 (慶州 校洞 崔氏 古宅) / 중요민속자료 제27호

 

경주 최씨의 종가로 신라시대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전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9대째 대대로 살고 있으며 1700년경 이 가옥을 지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건물 구성은 사랑채·안채·대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중 대문채에는 작은 방과 큰 곳간을 마련하였다. 사랑채는 안마당 맞은편에 있었으나 별당과 함께 1970년 11월 화재로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

 

사랑채터 뒷쪽에 있는 안채는 트인 'ㅁ'자형이나 실제로는 몸채가 'ㄷ'자형 평면을 가지고 있고 'ㄱ'자형 사랑채와 '一'자형 중문채가 어울려 있었다. 또한 안채의 서북쪽으로 별도로 마련한 가묘(家廟)가 있는데 남쪽으로 난 반듯한 길이 인상적이다. 안채 뒷편으로 꽃밭이 있어 집 구성에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대체로 잘 보존하고 있어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지정 당시 명칭은 경주최식씨가옥(慶州崔植氏家屋)이었으나, 경주 최씨가문이 대대로 살아왔던 집이고, 경주의 이름난 부호로 '교동 최부자 집'으로 널리 알려져 있어 ‘경주교동 최씨 고택’으로 명칭을 변경(2007.1.29) 하였다.

 

 

 

 

 

 

 

 

 

 

경주 교동 최씨 고택의 사랑채 현판에 보이는 '둔차(鈍次)'는 최준의 부친 최현식의 아호로, '재주가 둔해 으뜸가지 못한다'는 뜻이며,  '대우헌(大愚軒)'은 최준의 증조부

최세린의 아호로 크게 어리석다는 '대우(大愚)'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최 부자 가문은 1대 최진립(崔震立·1568~1636)부터 12대 최준(崔浚·1884~ 1970)까지 12대를 가리킨다는데, 300년을 내려온 재산은 최준이 1947년 인재 양성을 위해 전 재산을

털어 대구대학(현 영남대)과 계림학숙을 세웠다. 
 

 

'大愚軒(대우헌)

 

'鈍次(둔차)

 

 

 

 

 

 

 

경주효불효교지 (慶州孝不孝橋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에 있었던 삼국시대의 다리터.


1982년 8월 4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35호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2004년 11월 27일 지정 해제되었으며, 같은 날 사적 제457호로 승격, 재지정되었다[기존의 경주효불효교지(경주월정교지)가 경주일정교지와 함께 사적으로 지정됨]. 경상북도 기념물 지정 당시 지정면적은 2,200㎡이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이 다리에 얽힌 전설 한 토막이 전해온다. 그 내용은 “신라 때 아들 7형제를 둔 과부가 있었는데 사통하는 남자가 물의 남쪽에 있었으므로 아들들이 잠들기를 엿보아서 가곤 하였다. 그 아들들이 서로 말하기를 ‘어머니가 밤에 물을 건너 다니니 자식된 자의 마음이 편안할 수 있는가’ 하고 드디어 돌다리를 놓으니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겨 행실을 고쳤다. 그 때의 사람들이 그 다리를 효불효교라 불렀다”는 내용이다. 또 일곱 형제가 합심하여 놓은 다리라는 뜻에서 칠성교(七星橋)라고도 했다.

 

 

 

                                                                                                                                                    촬영일: 2015년 12월 26일(토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