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계곡
동해 무릉계곡은 두타산과 청옥산을 배경으로 호암소에서 용추폭포에까지 이르는
약 4km의 수많은 기암괴석과 절경들이 장관을 이루는 계곡을 말한다.
조선 선조 때 삼척부사 김효원(金孝元)이 신선이 노니는 계곡이라 하여 ‘무릉계곡’이라 이름을 붙였다고 전해진다.
계곡 입구에는 호랑이가 건너뛰다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호암소가 있으며, 무릉반석 옆에는
한말 유림들의 뜻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금란정이 있다.
또 무릉계곡에서 좀 떨어진 곳에 천은사의 전신인 용안당이 있었는데, 고려시대의 학자인 이승휴가
이곳 용안당에 머물며 <제왕운기>를 집필하였다 한다.
금란정(金蘭亭)
삼척의 유생들은 향교 명륜당에 모여 유학강론에 전념했는데, 일제 강점기에 강제로 향교가 폐강된다.
유림들은 분개하고, 민족혼을 찾기 위해 금란계(金蘭契)를 결성하고, 후손들이 이곳에 금란정을 세워 그 뜻을 계승했다.
최인희 시비
천은사와 삼화사에서 유년기 청소년기를 보낸 시인 최인희는 삼척 출신으로 33세에 요절했다.
무릉계곡 삼화사 입구에 崔寅熙 시인의 시비詩碑가 있다.
“낙 조”
소복이 산마루에는 햇빛만 솟아오른 듯이 솔들의 푸른빛이 잠자고 있다
골을 따라 산길로 더듬어 오르면 나와 더불어 벗할 친구도 없고
묵중히 서서 세월 지키는 느티나무랑 운무도 서렸다 녹아진 바위의 아래위로
은은히 흔들며 새어오는 범종소리
白石이 씻겨가는 시낼랑 뒤로 흘러 보내고 고개 넘어 낡은 단청
山門은 트였는데 천년 묵은 기왓장도 푸르른 채 어둡나니.
무릉반석 암각서(武陵磐石 岩刻書)
계곡 초입에 펼쳐진 무릉반석 넓이가 1,500여 평으로 천명이 한꺼번에 앉을 수 있을 정도로 넓다.
무릉반석에 새겨진 명필의 석각은 선조들의 풍류를 보는 듯하다.
조선4대 명필로 안평대군, 양사언, 한석봉, 김정희를 일컫는데
명필답게 무릉반석에 크게 새겨놓은 양사언의 초서체 친필 석각이 춤추는 듯 보였다.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 양봉래의 글을 똑같은 모양으로 평평한 바윗돌에 새겨놓았다.
武陵仙源, 신선이 놀닐던 무릉도원,
中臺泉石, 너른 암반과 샘이 솟는 바위,
頭陀洞天, 번뇌조차 먼지처럼 사라진 골짜기.
유한전 이조중기의 학자였다고 한다.
무릉반석과 물놀이하는 피서객들이 바위위에 자리깔고 있어 더 자세히 들여다 보지는 못했다.
금란정을 지나고 삼화사로 들어가는 일주문
頭陀山三和寺 활달 분방한 필체가 힘차 보이는 독특한 탄허스님이 쓴 현판이라고 한다.
두타산 삼화사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642년(선덕여왕 11) 신라시대 자장(慈藏)이 당(唐)나라에서 귀국하여 이 곳에 절을 짓고 흑련대(黑蓮臺)라 하였다.
864년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절을 다시 지어 삼공암(三公庵)이라 하였다가, 고려 태조 때 삼화사라고 개칭하였으며,
많은 부속 암자를 지었다.
1369년 절을 크게 확장하였는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어 중건하였으며, 1905년 의병(義兵)이 이곳을 근거지로 활약하다가
1907년 왜병의 공격으로 또다시 소실된 것을 이듬해 중건하였다.
1977년 이 일대가 시멘트 공장의 채광지로 들어가자 중대사(中臺寺) 옛터인 무릉계곡의 현위치로 이건하였다.
경내에는 대웅전, 약사전(藥師殿)을 비롯하여, 문화재로 신라시대의 철불(鐵佛),
3층석탑 및 대사들의 비(碑)와 부도(浮屠)가 있다.
촬영일: 2011년 8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