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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탄의 남근석(男根石)

기이하고 괴상한 바위와 돌을 보면 흔히들 기암괴석(奇巖怪石) 이라고 부른다. 신성계곡 녹색길 지질탐방로 백석탄의 남근석(男根石)을 찾아서 그곳을 다시 찾아가 보았다. 남근석 보다 더 인상적이기도 했던 기암(奇巖) 하나 동물의 왕국에서 두꺼운 북극의 얼음을 뚫고 나와서 떡하니 버티고 앉아있는 물개 한 마리가 연상된다. 신성계곡 녹색길 지질탐방로 어디쯤인지 이 남근석에 관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는듯 직접 안내판을 찾아볼 수는 없었지만 사진에서 검색되는 안내판의 내용을 옮겨보면 아래와 같았다. 남근석 Penis-Shaped Namgeun Stone 기암괴석 중 압권인 구백석탄 남근석은 전설의 주인공 전국에 이름난 남근석들이 많지만 구 백석탄의 남근석을 따라올 만한 자연의 조각물은 단연코 없다고 장담합니다. 이..

주왕산 절골 협곡(峽谷)

주왕산 절골 협곡(峽谷) 절골협곡(峽谷)은 주왕산국립공원 절골분소에서 대문 다리까지 약 5㎞에 걸쳐 발달한 좁고 깊은 V자형 계곡을 말한다. 절골협곡(峽谷)은 화산폭발로 분출된 화산재가 식어 굳어진 응회암으로 구성된다. 화산재가 식으며 굳어지는 과정에서 수축이 일어나 암석이 틈이 생기는 데 이를 절리라고 한다. 용추협곡과 마찬가지로 절골협곡도 수직 방향의 절리가 발달하며, 이 절리를 따라 침식작용이 일어나 골짜기가 형성되었다. 이 골짜기를 따라 물이 흐르며 암석 바닥을 깎아 현재와 같은 좁고 깊은 골짜기가 만들어졌다. 인공시설물을 최소화한 친환경적 탐방로로 관광객들은 여울을 따라 놓인 징검다리를 이용해 도보여행을 즐길 수 있다. 옛날 운수암(雲水庵)이라는 절이 있어 절골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알려져있다..

주산지(注山池)의 아침

주산지(注山池)는 주왕산면 주산지리 상이전 마을로부터 동쪽 방면으로 약 1.3㎞ 떨어진 곳에 있는 농업용 2종 저수지이다. 저수지는 농어촌 용수를 확보할 목적으로 하천, 하천구역 또는 연안구역 등에 물을 가두어 두거나 관리하기 위한 시설과 홍수위(洪水位) 이하의 수면 및 토지를 말한다. 「농어촌정비법」제2조에 의거하여 저수지는 농업생산기반시설로 분류된다. 주산지라는 이름은 저수지의 동쪽 청송군 주왕산면 내룡리 고개 주산재[주산령(注山嶺)] 정상부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을 가두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주산지는 1720년 8월에 착공되어 이듬해 1721년(경종 1) 10월에 준공되었다. 이 당시 주산지 축조에 공헌한 처사(處士) 이진표(李震杓)와 절충장군(折衝將軍) 임지훤(林枝萱)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송덕비(..

계곡의 가을 백석탄

세심대(洗心臺) 심중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 낸다는 뜻이다. 마음속의 더러움이란 일신의 안위와 재물을 탐하고 권력에 아부하는 인간의 부정적 속성 그런 마음을 씻어내고 안분지족 하면서 심신을 수양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안분지족(安分知足) 편안한 마음으로 제 분수를 지키며 만족할 줄을 앎. 안빈낙도(安貧樂道) 가난에 구애(拘礙)받지 않고 도(道)를 즐김 포트 홀 (pot hole) 암반으로 이루어진 하천의 바닥에 하수의 침식 작용으로 인하여 생긴 원통형의 깊은 구멍. 화강암과 같은 암석으로 된 하천 바닥에 잘 나타난다. 찾았다 세심대! 지난번 다녀와서 검색을 해 보니 부백 윤현기 각석 (府伯 尹顯岐 刻石)과 마주보는 약 10m 거리에 있다는 내용을 참고하여 살펴보니 우뚝 솟은 위치에 새겨진 세 글자 관..

만안자암단애(萬安紫巖斷崖)

만안자암단애(萬安紫巖斷崖) 만안자암 단애는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지소리 일대 길안천 신성계곡 오른쪽 기슭에 형성된 하식애(河蝕崖)로, 적벽(赤壁)이라고도 불린다. 만안자암 단애는 중생대 백악기의 경상분지 퇴적암으로 일직층 상부에 속한다. 퇴적암은 지표면에서 형성된 풍화 및 침식, 화산 쇄설물 등이 운반, 퇴적된 후 굳어져 생선된 암석으로, 만안자암 단애는 하천환경 아래의 퇴적물이 굳어지면서 형성된 퇴적암이다. 이 퇴적암이 서서히 지반운동으로 인해 융기하면서 하천의 측방침식 및 풍화로 인해 지금의 모습으로 되었다. 자암(紫巖)은 ‘붉은 바위’라는 뜻으로, 이는 만안 자암 단애를 이루는 기반암의 색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신성계곡 방호정 앞을 지나서 오르막 커브길을 오르다가 도로변 좌측 산비탈에는 신성..

신성리 공룡발자국

신성리 공룡발자국 /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신성리 산100-1 퇴적암으로 이루어진 신성리 일대는 약 1억 년 전 숲으로 둘러싸인 가운데 드넓은 평원 내 형성된 호수였다. 숲에 서식하던 공룡들은 건조한 날씨에 물이 부족해지자 호숫가로 이동하여 물을 마셨다. 이 과정에서 주변 자갈, 모래, 진흙과 같은 퇴적물에 발자국이 찍히게 되었고, 가뭄이 이어지면서 발자국이 굳어지게 되었다. 이후 발자국 위에 퇴적물이 반복적으로 쌓이면서 공룡 발자국은 점차 땅속으로 묻혀 암석으로 굳어졌다. 신생대 초 한반도 지각이 융기하면서 지표면으로 상승한 공룡 발자국 화석층을 덮고 있던 퇴적층은 풍화와 침식을 받아 조금씩 깎이게 되었다. 그 후, 2003년 기후변화(지구온난화) 때문에 형성된 슈퍼태풍에 의해 산사태가 발생하여 퇴적..

백석탄 계곡(白石灘 溪谷)

백석탄 계곡(白石灘 溪谷) 경상북도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에 있는 백석탄(白石灘) 계곡(溪谷). 방호정(경북민속자료 51)이 있는 신성계곡 북서쪽에 있다. 계곡의 암반이 온통 눈으로 덮인 듯이 하얗고 그 위를 맑은 물이 흐른다. 신성계곡에서 이곳에 이르는 3㎞ 구간이 청송8경 가운데 제1경으로 지정되었다. 옛 선현들이 고기를 낚았던 조어대(釣魚臺)와 고기를 낚다 보면 저절로 시상(詩想)이 떠올랐다는 가사연(歌詞淵)이라는 소(沼)가 유명하다. 조선 인조 때 김한룡(金漢龍)이 고와마을을 개척하고는 시냇물이 맑고 아름다워서 고계(高溪)라 불렀다고 하며, 1593년(선조 26)에는 고두곡(高斗谷)이란 장수가 임진왜란 때 왜군에게 부하를 잃고 이곳을 지나다가 아름다운 경치에 마음의 상처를 달랜 뒤 고와동이라 이름을..

쏠비치 삼척

태양의 해변이라는 의미의 쏠비치 호텔&리조트 삼척 그리스 산토리니 마을의 건축 미학을 담은 쏠비치 호텔&리조트 삼척은 하얀 외벽과 파란색 지붕의 조화가 돋보이는 그리스 키클라틱 건축양식을 모티브로 환상적인 바다 전망과 어우러지는 709실 규모의 호텔 & 리조트로 탄생했다. 맑고 투명한 옥빛 물결, 파도의 리듬에 맞춰 한걸음 한걸음씩 속도를 줄이다 보면 어느덧 마음이 치유될 것이다. 그리스 남부의 작은 섬 산토리니 파란 지붕과 하얀 건물이 지중해의 코발트 빛 바다와 어우러져 마치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풍경을 연출한다. 내셔널 지오그래피 선정 세계 10대 낙원 중 한 곳으로 꼽히는 이곳은 수많은 여행객이 찾는 그리스의 대표적인 관광지이자 세계적인 관광지로 우리에게는 어느 음료의 광고촬영지로 널리 알려져 있..

한반도 지형

왜 한반도 모양이 되었을까? 감입곡류란 하천이 흐르는 지역이 융기되거나 하천이 계속 아래를 깍으면서 흐를 때 자유로운 방향으로 구불구불한 형태를 보이면서 아래를 깊게파서 만들어진 하천을 말한다. 한반도 지형을 유심히 보면 하천이 흐르는 바깥쪽은 하천이 빠르게 흐르기 때문에 주변의 암석을 깍아서 절벽이 생기는 곳이며, 하천의 안쪽에는 물이 천천히 흘러서 모래가 쌓인것이 보인다. 하천이 점점 옆쪽으로 암석을 깍아서 넓어지면 이와같은 한반도의 모양이 가운데에 생기게 된 것이다. 앞으로 먼 미래, 한반도의 지형이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 상상해 볼만도 하다. 융기(隆起) 조륙운동 또는 조산운동 등 지각운동에 의해 지반이 점차적으로 상승하는 현상. 영월 청령포(寧越淸泠浦) 1971년 12월 16일 강원도기념물 제..

화진포 역사안보전시관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의 별장 이승만 대통령 화진포기념관 이승만 별장 뒤에 새로 지어진 기념관으로 이승만대통령의 업적 등 일대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친필휘호, 의복과 소품, 관련도서 등이 현대적으로 전시되어있다. 이승만별장은 이와는 좀 다르게 정겹게 꾸며져있다. 침실과 거실, 집무실, 평소에 끼던 안경과 여권, 편지 등 유품이 흥미롭게 진열되어 있다. 강원도 고성군 화진포에는 세 명의 옛 정치인의 별장인 김일성별장, 이승만별장, 이기붕별장이 나란히 놓여 있다. 이승만 별장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이 머물렀던 곳으로 1954년에 신축된 뒤 1961년에 폐허가 되었다가 1997년 7월 육군이 재건축하여 1999년 전시관으로 복원되었다. 별장의 외부는 별장답지 않게 아담하고 소박하며 허름하게 보이기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