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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장낙안(金丈落雁) 금장대(金藏臺)

도랑도랑 2012. 9. 9. 09:32

경주 금장대 복원공사 준공 (9월4일 포항mbc뉴스)

기 자: 김병창 기자
방송일:2012-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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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금장대 복원공사가 마무리 돼
오늘 (오후 3시) 준공식이 열렸습니다.
◀END▶

지난 2010년 발굴공사를 거쳐 3년동안
29억원을 들여 중창한 금장대는 연면적
154 제곱미터의 전통 한옥식 정자로,
주변의 하천과 어울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경주시는 역사와 설화의 보고이고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배경이기도 한 금장대를
새로운 문화관광 코스로 적극 활용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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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시간이 자유로웠던 날

오랫만에 청명한 가을 하늘엔 아직도 해가 중천에 남은듯

곧바로 하루전 뉴스로 보았던 금장대를 구경해 보고 싶어져서 달려가 보았다.  

 

 

금장대는 금장낙안(金丈落雁)이라고 불렸는데 기러기들이 쉬어가는 곳으로 그 풍경이 일품이었다고 하며, 애기청소(靑沼) 앞의 작은

산봉우리로 주변의 절경으로 인해 신라시대 3기8괴의 하나이며 김동리 소설 '무녀도'의 배경으로 유명하다.

 

금장대에 절이 있었다는 것은 1980년 사리공양석상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구전으로만 전해져 왔으며 금장대 남쪽 절벽에 있는

암각화 또한 1994년에 발견되고도 사람들의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했다.

금장대는 임진왜란때는 경주읍성을 탈환하기 위한 서천 전투의 지휘 본부가 있었고

시인 묵객들이 찾아 시를 읊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곳이라고 한다.

 

 

신라시대 부터 통일신라시대까지 전해져 오는 3가지 진기한 보물과 8가지 괴이한 풍경을 뜻하는 삼기는

금척, 옥적, 화주(또는 성덕대왕신종)이며, 팔괴는 남산부석, 문천도사, 계림황엽, 압지부평, 백율송순, 금장낙안, 불국영지, 나원백탑,

서산모연, 금오만하이다.

 

신라의 불가사의 삼기팔괴(三奇八怪)

금척(金尺)은 박혁거세 거서간이 즉위하자 하늘에서 금으로 만든 자를 선물로 내려주었는데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낫고 죽은 사람을 재면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신비스러운 것이다.
이 소문이 중국의 한나라 형제에게까지 가자 황제는 금자가 탐이나 사신을 보내어 보여줄 것을 청했다.
낭패를 당한 신라에서는 왕과 신하가 의논하여 금자를 땅에 묻고 봉분을 만들고 사신은 금자가 묻혔다는
무덤을 찾아봐서 똑같은 무덤이 많고 뾰죽한 방법이 없어서 그대로 돌아가 버렸다.
그 후 금자가 묻혀있는 곳이라 마을이름도 금척이라 불리고 있다.


옥적(玉笛)은 신라 제31대 신문왕의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동해 바닷가에 감은사지를 짓고 난 다음에
해룡이 된 문무왕과, 천신이 되니 김유신의 혼령이 서로 힘을 합쳐 용을 시켜 보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을 만파식적이라고 한다.
경주 관아에서 본관해 오다가 조선 중엽에 잃어 버리는 것을 동경관의 담장 밑을 파다가
우연히 찾아 내었다고 감은 옥적은 세동강 난 것을 은으로 이었고, 옥피리는 한 쌍을 해두어야 좋다고 해서
그 뒤의 경주 부윤이 황색 옥피리를 만들었다.


화주(火珠)는 빛깔이 수정과 같고 햇볕을 받아 비추면 솜에 불이 붙었다고 한다.
이 보물은 선덕여왕이 지니고 있던 수정 돋보기로 태양에서 불씨를 얻고,
그 뒤에 백률사에 보관하여 지금은 전하지 아니한다.

 

 

 

신라의 불가사의 삼기팔괴(三奇八怪)

남산부석(南山浮石)은 버선을 거꾸로 세워 놓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버선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며, 남산의 국사골에 있다.
큰 바위 위에 또 한 개의 바위가 얹혀 있는데, 실을 넣어 당겨보면
바위가 공중에 뜬 채로 있기 때문에 실이 빠져 나온다는 속설이 있다.

 

문천도사(蚊川倒沙)는 문천(남천)의 모래는 너무나 부드러워 물은 아래로 흘러가지만
모래는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한다.
문천은 예로부터 모기내 또는 물개(모래)내라고 불렸다.

 

계림황엽(鷄林黃葉)은 계림의 나뭇잎은 움이 트면서 붉은색을 띄는 것이 신비롭다.

압지부평(鴨池浮萍)은 안압지에는 부평초가 무더기로 떠다니는데,
뿌리가 땅에 닿지 않은 채 바람에 밀려 다니는 모양이 또한 장관이다.

 

백율송순(栢栗松筍)은 소나무에는 순이 돋아나지 않는데 백율사에 있는 소나무에는
가지를 치면 거기서 새 순이 새겨져 있다.

 

금장낙안(金丈落雁)은 금장은 서천과 북천(알내)이 합치는 곳으로 임금이 노닐던 금장대가 있다.
높은 바위에 올라서 바라보면 서라벌이 한눈에 굽어 뵈는데, 애기청소 푸른 물에 비치는
전망이 아름다워 날아가던 기러기도 잠시 내려서 쉬어갔다.

 

불국영지(佛國影池)은 아사달과 아사녀의 전설이 얽혀있는 영지에는 날이 밝으면 불국사의 전경이
물에 비치는데, 다보탑만이 보이고 석가탑은 비치지 않으므로, 사람들은 석가탑을 무영탑이라 부른다.

나원백탑(羅原白塔)은 현곡면 나원리에 있는 나원리 오층석탑 신라 중기에 만든 탑으로,
백색의 화강암으로 만들졌고, 흰 이끼가 끼므로 "백탑"이라 불렸다.

 

서산모연(西山慕煙)은 선도산은 서라벌의 서쪽을 지키는 성산으로 선도성모가 계신 곳으로
크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석양이 비친 노을이 빼어남으로 서산모연이라고 한다.

 

금오만하(金鰲晩霞)는 금오산(남산)은 언제나 아지랑이가 끼어 있다.
아지랑이가 저녁놀에 반사되어 연분홍 빛으로 피어오르는 광장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신비한 아름다움이다.

 

 

 

 

금장대와 관련한 뉴스기사 내용들을 검색해 보면 복원이란 단어들이 대부분이다.

이 머릿돌에 쓰여진 중창이란 글씨가 더 잘어울린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전적 의미에서 복원(復元)이란 원래대로 회복 하는것을 의미하며,

중창(重創)이란 낡은 건물을 헐거나 고쳐서 다시 짓는것을 말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름난 사찰이나 정자를 만났을때 편액의 글씨를 유심히 살펴봐도 재미있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 금장대에서는 궁금증도 생겼다.

정문 안으로 들어서고 신발을 벋고 정자 안으로 들어가는 머리위에 걸려있는 금장대란 편액글씨와

형산강 쪽에서 바라보이는 쳐다 보아야하는 위치에서 본 편액의 글씨체는 각각 다르게 쓰여져 있질않은가?

 

이날 난 여길 오르면서 지난 몇년동안 이 앞 길을 수없이 지나 다녀왔지만 여기에 암각화가 있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고 있지를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애기청소에 관한 이야기도 최근 준공식 뉴스를 보면서 그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게 되었다.

 

 

 

금장대 아래에는 경주시가지의 북서쪽으로 서천과 북천이 합쳐져 형산강을 이루는 곳으로 '애기청소'라고 불린다.

애기청소는 신라 제20대 자비왕 때 을화(乙花)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왕과 연희를 즐기는 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경주지방 사대부들이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던 푸른 소(沼)로 전해지고 있다.


애기청소 위 바위절벽이 있으며, 이 절벽 중턱의 바위를 파낸 곳에 암각화가 새겨져있다. 방패모양이라고도 하는 검파형, 사람얼굴, 돌칼,

돌화살촉, 꽃무늬, 사람발자국, 짐승, 배 등 30여점의 매우 다양한 그림이 등장한다.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던 신앙의례의 장소로 추정된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암각화는 암석의 백화현상과 바위 이끼들로 마모가 심하였으며, 새겨져 있는 기호나 물건의 모양들이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으로 표현되어

시각으로 일반인은 구별하기 힘들었다.

 

 

 

 

 

경주 석장동 암각화(慶州錫杖洞岩刻畵)

 

1994년 9월 29일 경상북도기념물 제98호로 지정되었다.
1994년 3월에 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유적조사팀이 발견하였으며,
물상암각화에서 기하학문 암각화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성격을 띤다.
쪼아파기와 쪼고 갈아파기 같은 제작기법이 절충되어 청동기시대 중기와
말기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형산강변에 접한 금장대 수직절벽 윗부분에 있는데, 세로 9m, 가로 2m 되는 바위면에
추상적 도상(圖像)으로 음각되었다.
그림이 새겨진 바위면은 남쪽을 향하며 모두 6개 면으로 꺾여 층단을 이루는데,
바위그림을 새기기 위하여 수직면으로 다듬은 것으로 보인다.

 

그림은 왼쪽의 1, 2, 3바위면에 집중적으로 조각되었고 4, 5, 6면은 인면(人面)으로 추정되는
 바위그림만 여러 점 있다. 주로, 쪼아서 선을 이루는 선각기법(線刻技法)으로 조성되었으며,
26점의 문양이 31개 무리를 이루고 있다.

 

각각 형태가 조금씩 다르지만 방패(防牌), 도토리, 인물, 꽃무늬형 등 크게 9개 문양으로 분류된다.
고령 양전동 암각화식(式)의 깃털이 조각된 인면암각화(人面岩刻畵)가 특이한데,
전투에 참가한 병졸의 형상으로 보인다.

 

방패형은 청동기시대 전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이 갖기를 원하는 여성들이
조각한 것으로 보이는 어린아이의 발자국, 수렵 나가기 전 동물이 잘 잡히기를 기원하면서
조각한 꽃 모양의 동물 발자국 등이 있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조각기법대로 인물상 속에서 남성은 자신의 성기를 노출시키고
여성은 생식기만 조각되어 있는데, 다산과 생산물의 풍요를 기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탈, 산, 동물, 4사람이 탄 배 같은 문양도 보이는데, 특히 배에 사람이 타고 있는 모습은
청동기시대의 어로활동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모습은
울산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와 울주 천전리 암각화에서도 확인된다.

 

금장대 정상부분에 통일신라시대의 석실고분군이 밀집해 있고 바위그림 북서쪽 민묘 주변에
통일신라시대의 초석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어, 일대가 금장사지 또는 건물터로 추정된다.
주변에서 채집된 반달돌칼[半月形石刀] 조각은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고고미술사학과에서 보관하고 있다.

 

[출처] 경주 석장동 암각화 | 두산백과

 

 

 

 

애기청소는 신라 제20대 자비왕 때 을화(乙花)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왕과 연희를 즐기는 도중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조선시대 경주지방 사대부들이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던 푸른 소(沼)로 전해지고 있다.

금장동 암각화를 찾아 보면서 직벽처럼 돌출된 바위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그 소가 애기청소였다.

그 애기청소 잔잔한 물 위에는 하루 전 준공식 때 띄웠는지 두사람의 사공이 심심해 보이기도 한 돛단배가 유유히 떠돌고 있었다.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의 배경이 된 금장대

김동리(金東里)가 지은 단편소설 무녀도의 내용을 살펴보면

 

1936년 5월 ≪중앙≫에 발표되었고, 1947년 을유문화사에서 같은 제목으로 간행한 단편집 ≪무녀도≫에

수록될 때 많은 부분이 개작되었으며, 또한 1978년 <을화 乙火>라는 장편소설로 확장, 개작되었다.

서화와 골동품을 좋아하던 ‘나’의 할아버지 생존시, ‘나’의 집에 나그네로 들렀던 벙어리 소녀와 그녀의 아버지가 남기고 간 <무녀도>라는

그림에 담긴 내력은 다음과 같다.

 

모든 것에 귀신이 들어 있다고 믿으며 귀신만을 섬기는 무당인 모화는 그림을 그리는 딸 낭이와 더불어 경주 잡성촌의 퇴락한 집에서 살고

있다. 그런데 어려서 집을 나갔던 아들 욱이가 이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모화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욱이가 신봉하는 기독교와 모화가 받드는 귀신 간에 갈등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모자간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신관(神觀)과 가치관 때문에 상호 용납하지 못하며, 각각 기도와 주문으로 대결하다가

마침내 모화가 성경을 불태우고, 이를 저지하려던 욱이가 칼에 찔림으로써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 뒤 마을에는 예배당이 서고, 힘을 잃게 된 모화는 예기소에서 죽은 여인의 넋을 건지는 마지막 굿판을 벌이게 된다.

모화는 드디어 무열(巫悅)의 상태에서 춤을 추다가 물 속에 잠기고, 낭이는 그를 데리러 온 아버지를 따라 어디론가 사라진다.

 

 

 

 

 

 

 

 

 

경주 동국대 동편에 나즈막한 야산이 남북으로 놓여있다.
남북길이 약 0.5km, 동서 약 0.3km이며 북쪽 봉우리의 높이가 90m, 남쪽 봉우리가 70m정도의 구릉성 산지이다.
그러나 산의 이름은 정해진 것이 없고 언젠가 이곳에 세워져 형산강(兄山江)의 지류인 서천(西川)과 북천(北川)의
합류지점인 청소(淸沼)주변의 멋들어진 자연경관과 더불어 경주지방의 선비들이 풍류를 즐겼을
금장대(金丈臺•金丈臺)라는 정자의 이름이 산이름을 대신하고 있다.

 

금장대가 놓여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지 주변의 역사는 아주 오랜 시간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1994년 3월에 이곳 남단(南壇)에 병풍처럼 놓여있는 수직의 암벽에서 청동기시대의 문화를 밝혀줄
암각화와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등 유물 몇 점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예기청소(藝技淸沼)와 삼기팔괴(三奇八怪)의 하나인
금장낙안(金藏落雁)으로 유명하였다.

 

특히 예기청소에 대한 명칭은 몇 갈래의 전설이 공존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들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신라 제20대 자비왕대에 [을화(乙花)]라는 기생이 이곳에서 왕과 연회(宴會)를 즐기다가 실수로 빠져 죽었다는 설,

둘째 조선시대 경주지방 사대부들이 예기(藝技)인 기생들과 풍류를 즐기던 푸른 소(沼)라는 설,

섯째 김동리의 소설 [무녀도]이후에 와전(訛傳)되어, 매년 한명씩 어린아이(애기)들이 빠져 죽는데서
그러한 명칭이 부여되었다는 설,

넷째 신라시대 귀족의 딸인 예기 또는 애기라는 처녀가 결혼을 앞둔 단오절에 친구들과 같이 금장대에서
소나무에 매어 둔 그네를 타다가 떨어져 아래 강물에 빠져 죽었다.

이후부터 이 강물에는 물놀이나 고기잡이를 하던 사람들의 익사사고가 자주 일어나 예기청소라 불렸다는 설 등이다.
그러나 그 어느 이야기도 정확한 것은 아니다. (출처:http://www.emile.co.kr/ 에밀레)

 

                                                                                                                사진 촬영일: 2012년 9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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